"안개가 유령처럼 달려든다" 설악 능선, 인제천리길의 비경

2024. 11. 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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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석의 Wild Korea〈19〉 인제천리길


설악마주보길을 걷다가 외로운소나무 앞에서 본 설악산 서북능선. 능선 왼쪽으로 톡 튀어나온 봉우리가 안산 정상이다. 오른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바위 등이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인제천리길’은 강원도 인제군의 구석구석 끊긴 길과 버려진 길을 한 땀씩 기워 만든 트레일이다. 36개 코스 약 505㎞가 실핏줄처럼 이어진다. (사)인제천리길 김호진(64) 대표의 추천을 받아 인제천리길 중 설악마주보길, 읍내가던길, 은비령길을 걸었다.

격렬하게 꿈틀대는 운해


“예까지 오셨으니 설악마주보길에서 운해를 만나 보셔야죠.”
김 대표 말에 혹해서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자동차 상향등을 켜자 안개가 유령처럼 달려들었다. 말고개터널을 나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임도를 한 바퀴 돌아 회귀하는 길이 설악마주보길이다. 4-1코스인 문화재소나무길의 일부분이다.
설악마주보길에서 만난 장대한 운해. 단풍 물든 설악산과 구름바다가 어우러져 장관을 빚었다.
일출을 40분 앞둔 오전 6시 10분. 구불구불한 임도를 걷다가 고개를 드니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운해는 물 건너갔나?’ 싶었는데 뒤를 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저 멀리 골짜기에 구름이 가득했다. 최고의 운해 전망대는 일명 '외로운소나무' 앞이다. 기다렸다는 듯 해가 솟았다.
골짜기를 메운 운해 위로 빛이 쏟아진다. 운해가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남서쪽 운해 끝자락으로 아스라이 홍천 가리산이 보인다. 가리산까지 직선거리는 약 42㎞. 그 안이 온통 구름바다로 덮였다.
설악마주보길의 외로운소나무. 이 나무 앞이 운해와 설악산 조망 포인트다.
이제 설악산 조망을 즐길 차례다. 속초나 양양 바다에서 본 모습과 영 딴판이다. 동쪽 건너편으로 설악산 서북능선이 육중한 몸매를 자랑한다. 가장 높은 곳에 안산의 상징인 뾰족한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다. 서북능선 왼쪽으로는 설악산 공룡능선·미시령·신선봉 등이 하늘에 파노라마를 그린다.
하산은 계속 임도를 따르면 된다. 금강송 군락지를 거쳐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설악마주보길은 산불통제 기간(11월 15일~12월 15일)에는 갈 수 없다. 딱 일주일 남았다. 단풍이 끝물이니 서둘러 다녀오시라.

제주올레 걸은 뒤 만든 길


2-1코스 읍내가던길은 남전리와 원대리 주민이 읍내로 장 보러 다니던 길이다. 소양강둘레길, 박달고치의 원시림, 구상나무와 잣나무 조림지, 원대리 자작나무숲까지 품고 있어서 인제천리길을 대표한다. 읍내가던길은 곧은골길과 자작회동길로 나뉘는데, 곧은골길 구간만 김 대표와 함께 걸었다.
남전리와 원대리 주민들이 장 보러 다녔던 곱은골은 원시적 느낌이 물씬 풍긴다.
출발점은 인제터미널이다. 읍내를 벗어나면 내린천을 따르다가 소양강 둘레길로 접어든다. 소양강 옆 오솔길을 따르는 호젓한 숲길이다. 길은 소양강을 낀 오지마을인 금바리로 이어진다. 소양호가 훤히 보이는 전망이 빼어나다. 돌탑을 지나면 곱은골로 접어든다. ‘곱은’이란 말처럼 길이 고불고불 박달고치로 이어지는데 풍성한 원시림이 펼쳐진다. 박달고치 정상에는 커다란 데크 전망대를 설치했다. 인제 읍내와 소양강이 잘 보인다.
읍내가는길 중간쯤에 자리한 박달고치 전망대. 인제 시내와 소양호가 구름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원대리에 사는 정순자씨 엄마가 읍내에 콩 팔러 갔어요. 어린 순자씨는 엄마가 단팥빵 사 온다고 해서 박달고치에서 오매불망 기다렸다지요.” 김 대표가 고개에 얽힌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려준다. 엄마가 가져온 단팥빵은 얼마나 맛있었을까.
인제천리길을 만든 주역인 김호진 대표. 인제 토박이로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길을 만들었다.
김 대표는 이런 식으로 길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하나 찾아내 인제천리길을 만들었다. 그가 길을 만든 건 제주올레 덕분이다. 2009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김 대표는 올레길을 걸으면서 몸을 회복했다. 값진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2011년부터 고향 땅 구석구석을 탐사했고 2016년 마침내 인제천리길을 개통했다.
박달고치에서 군 작전도로를 따라 3㎞쯤 내려오면, 명성 자자한 원대리 자작나무숲 입구에 닿는다. 읍내가던길 중 금바리~박달고치 구간이 산불통제 지역에 포함된다. 소양강둘레길과 자작나무숲은 통제되지 않는다.

비밀스러운 단풍 명소


단풍터널을 이룬 필례온천 구간.
10코스 은비령길은 이순원 소설 『은비령』의 무대다. 소설 속에서 은비령은 남녀 주인공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던 아련한 장소로 등장한다. 은비령길은 가리산 방재체험마을에서 큰눈이고개를 넘어 필례계곡으로 이어진다. 큰눈이고개는 보부상이 소금을 지고 넘었던 유서 깊은 고개다. 고갯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좁고, 작은 고개가 서너 개 이어진다. 큰눈이고개 일대는 장대한 숲이다. 봄과 여름철에는 곰배령처럼 화려한 야생화가 수놓는다.
(사)인제천리길이 필례계곡에 새롭게 만든 길.
큰눈이고개에서 필례약수로 내려가는 길은 순하다. 필례약수 입구 단풍 터널은 널리 알려진 단풍 명소다. 길은 단풍 터널 아래 계곡으로 이어진다. 인제천리길이 찾아낸 비경으로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호젓하게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계곡물은 떨어진 단풍잎으로 붉은 물이 되어 흐른다. 가을도 따라 흘러간다. 산불통제 기간에는 10코스 중 군량분교~필례온천 구간만 걸을 수 있다.

■ 여행정보

정근영 디자이너
인제읍에 자리한 남북면옥은 삼대째 내려오는 식당이다. 수육 안주에 동동주를 한 잔 걸치며 산행 피로를 풀기 좋다.

‘설악마주보길’은 말고개터널~외로운소나무~말고개터널, 7㎞ 2시간쯤 걸린다. 2-1코스 읍내가던길은 인제터미널~곱은골~원대리마을회관, 25.3㎞ 8시간쯤 걸린다. 10코스 은비령길은 짧은 편이다. 가리산 방재체험마을~큰눈이고개~군량분교, 10㎞ 3시간 30분쯤 걸린다. 마을버스가 인제터미널~원대리 자작나무숲~필례온천~한계령 등 주요 명소를 순환한다. (사)인제천리길은 올겨울 ‘눈꽃 눈길 함께 걷기’ 행사를 진행한다. 1박2일 일정으로 12월 15일 이후 6회 진행할 예정이다. 인제천리길이나 인제군 관광과에 문의하면 된다.

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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