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그도 ‘베트남 전쟁’을 그렸다

손영옥 2024. 11. 6.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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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꽃 이미지 속에 총을 든 군인들이 숨어 있다.

한국화로 그려진 이 전쟁 그림은 놀랍게도 '길례 언니'로 유명한 천경자의 '꽃과 병사와 포성'(1972)이다.

이들은 약 20일간 머물며 한국군의 활약상을 전쟁 기록화로 남겼는데, 천경자 역시 그 그룹에 포함됐던 것이다.

천경자를 중심으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와 제자 등 여성 작가 23명이 초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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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 여성의 삶과 예술’ 천 작가 탄생 100주년 기획전
이숙자 등 동료·제자 여성 작가 23명도 초대
천경자 ‘꽃과 병사와 포성’.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흐릿한 꽃 이미지 속에 총을 든 군인들이 숨어 있다. 저 너머엔 탱크를 몰고 가는 군인들도 있다. 베트남 민가와 대나무 잎으로 만든 전통 삼각형 모자를 쓴 현지인들도 있다. 한국화로 그려진 이 전쟁 그림은 놀랍게도 ‘길례 언니’로 유명한 천경자의 ‘꽃과 병사와 포성’(1972)이다. 당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인 이마동을 단장으로 해서 김기창, 박서보, 오승우 등 미술계 현역 작가 10명이 베트남 전장에 파견됐다. 이들은 약 20일간 머물며 한국군의 활약상을 전쟁 기록화로 남겼는데, 천경자 역시 그 그룹에 포함됐던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울 중구 서소문 본관에서 천경자(1924∼2015)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의 삶과 예술’을 한다. 천경자를 중심으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와 제자 등 여성 작가 23명이 초대됐다.

이숙자 ‘캠퍼스 훈련생’.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격동의 근현대사가 여성 작가라 해서 비껴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1전시실 ‘격변의 시대’가 가장 흥미롭다. 천경자의 이 작품 ‘꽃과 병사와 포성’은 작가로서는 감추고 싶은 이력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제목이 말하듯 여성 작가 역시 남성 작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격변의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국방부에 걸려 있다가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군사 정권 시기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진행되던 ‘교련’을 그린 이숙자의 ‘캠퍼스 훈련생’, 4·19 혁명 당시 희생된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문은희의 ‘무제(4·19 혁명)’ 등도 이 섹션에 초대됐다.

2전시실과 3전시실에서는 화가의 등용문 역할을 했던 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각각 당선된 작품을 보여준다. 천경자의 선전 입선작 ‘조부’, 박래현의 국전 입선작 ‘회고’, 이인실의 국전 문교부 장관상 ‘추교’ 등이 나왔다. 화랑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관전을 통과하고자 했던 여성 화가들의 야망과 성공이 작품마다 숨어 있다. 17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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