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언어를 단련한다는 것
노력 필요해… 그런 끝없는
고민이 노벨문학상의 밑거름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이어령 선생이 아직 19살이던 시절, 영특한 동생을 천재로만 알던 형은 선생의 서울대 국문과 합격 소식에 크게 낙담했다. “세상에 언문 배우러 대학 가는 놈도 다 있냐?” 언젠가 선생은 형님의 말에 자신의 선택을 조금쯤 후회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탄식은 당시 한국어가 학문 언어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7000여개에 달하는 전 세계의 언어 중에서 현대적인 학문 언어로 사용될 수 있는 말은 몇 가지나 될까. 많아야 수십 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눈의 종류를 10여개로 섬세하게 분류한다는 이누이트족의 언어는 분명 아름답고 풍요로울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들의 언어로 양자역학 연구서나 인도 유식학의 원전을 번역하거나 관련 논문을 작성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안타깝지만 개념어에 해당하는 단어가 충분치 않을 것이고, 학술적 표현에 대한 용례가 축적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언어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의 문제다. 오늘날 학문 언어는 서구 학문의 생산 방식에 결속돼 있어 일종의 ‘단련’이 필요하다. 즉 새로운 용어를 만들거나 외래어를 들여오고, 논쟁을 통해 이를 검토하며, 용례의 축적을 통해 소화해야 한다. 고생고생해서 번역했더니 누군가 그건 한국어도 외국어도 아닌 기괴한 말이라고 트집을 잡는다. 학회에 갔더니 오늘부터 용어는 이렇게 통일하자며 작은 책자를 나눠준다. 물론 그 내용은 일관적이지도 않고 납득하기도 어려워 목에 핏대를 세우게 된다. 사실 이런 풍경이야말로 주변부 국가의 학술 언어가 단련되는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학술서 편집자로 일했다. 이것은 나도 끝없는 소동의 작은 부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상에 앉아 원고에 가득한 ‘전기장’이라는 단어를 ‘전기마당’으로 바꾸거나, ‘미네랄’을 ‘무기물’로 바꾸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초판에는 모두 ‘전도도’라고 표기된 단어를 일일이 갈무리해 ‘전도도(conductance)’와 ‘전도율(conductivity)’로 구분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지곤 했다.
사실 모국어를 학문 언어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오히려 문제는 수월해진다. 생각해 보면 식민지 조선의 학생 대부분도 당시 상당히 단련된 학문 언어였던 일본어를 사용해 공부했을 것이고, 나름의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모국어를 학술 언어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한국의 학생들은, 좀 억울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이는 국제 학술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용어를 다시 익혀야 한다. ‘Tao Te Ching’이 ‘도덕경’이라는 것을 외워야 하고, ‘Duke Jing of Qi’가 ‘제경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만난 어떤 교수들은 학술서의 모든 단어를 영어나 한자로 표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똑똑한 제자들이 고작 언어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면 슬며시 화가 치밀지 않겠는가.
하지만 학문 언어들은 제도의 좁은 영역에서만 유통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발전소를 새로 건설하거나 특정한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할 때 학자들은 이를 한국어로 설명해야 할 당연한 사회적 의무가 있다. 학술서와 논문을 이용해 대중서를 쓰거나 언론 기사를 쓰는 이들에게 기준이 되는 용어를 제시해줄 필요도 있다. 젊은 편집자가 그런 식의 말을 꺼내면 교수는 애써 화를 누르고 묵묵히 교정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으며 나는 문학의 영역에서 언어를 단련하는 동료들 모습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어떤 단어와 문장이 삶의 신산함을 더 잘 드러내는지, 모국어의 결을 따라 어떻게 마음이 놓이고 흐르는지를 끝없이 함께 고민하는 이들의 기쁨이 온통 뒤엉켜 한자리에 놓일 수 있다면 좋겠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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