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PD 흑역사 "친정회사 '재벌집 막내아들'이 잘 될 줄 몰랐다" [안혜리의 인생]
'흑백요리사' 김학민 PD 인터뷰
그런데 첫인상이 너무 평범했다. 정말 아무 사연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알 없는 검정 뿔테 안경으로 얼굴에 살짝 힘준 걸 빼고는 외모도 전혀 튀지 않았고, 목소리 역시 톤의 높낮이 없이 차분했다. '싱어게인'(JTBC·2020) 등 화제의 음악 예능으로 나름 이 분야 스타 PD로 꼽히는데도, 화려한 연예인 인맥을 자랑하며 스스로 연예인급 스타성을 발휘하는 나영석·김태호 같은 예능 PD와는 전혀 다른 결의 사람이었다. 무슨 무슨 사단이라 불리는 연예인 군단을 몰고 다니는 이들과 달리, "친한 연예인 없다, 출연자들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라고 잘라 말할 정도였다. 대단한 카리스마도, 그렇다고 과거 요리 예능을 한 경험도 없는 그가 어떻게 한국 요식업의 대가 백종원이나 한국 유일의 미쉐린 3 스타 셰프 안성재 같은 자기 철학 확고한 인물(심사위원)과 100명의 요리사를 맛깔나게 조리해 한국 예능 최초로 넷플릭스 비영어 TV 시리즈 3주 연속 1위의 화제작 '흑백요리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알고 보니, 그의 성공엔 참담한 실패(넷플릭스 음악 예능 '테이크 원')가 먼저 있었다. 지난달 29일 4시간 동안 들은 예능 인생을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재벌집 막내아들'을 몰라보다니
" 아픈 손가락. " '흑백요리사'에 앞서 넷플릭스와 처음 작업했던 음악 예능 '테이크 원' 얘기다. 넷플릭스 코리아 첫 음악 예능이자 첫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입체 사운드를 구현하는 기술) 도입 등 유달리 '최초' 시도가 많았던 초대형 스케일의 기대작이었다. 청와대에서 원테이크로 이어진 비의 공연, 6년 공백을 깬 임재범, 비행기까지 동원한 악뮤, 한강에 배 띄운 박정현 등…. 역대급 무대라며 언론 보도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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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물주인 드라마 감독과 달리
예능 PD는 관찰자이자 광대
'척' 아닌 '찐' 찾는 시청자들
진짜 위해 두부 1800모 쌓다
」
이런 결과는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테이크 원' 마무리 작업 중 종종 넷플릭스를 찾았는데, 후반 작업 중이던 한 예능 영상을 먼저 본 적이 있다. 겉으로 말은 못했지만 속으론 '그림은 센데 서사가 없어 잘 되기 어렵겠네, 딱 봐도 돈 많이 들인 거 같은데 큰일이다' 싶었다. 이 예능이 뭐냐고? 넷플릭스 코리아 예능 최초로 글로벌 1위를 한 '피지컬100'(2023년 1월 공개)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테이크 원' 공개 당일인 지난 2022년 10월 서울 메가박스 성수에서 제작발표회를 했는데, 마침 한 달 뒤 방영할 JTBC 드라마 관련 무슨 행사도 있었다. 당시 다른 회사 소속이었지만 JTBC 공채 PD 1기(2011년)로 친정에 대한 애정이 여전했기에 드라마 제목만 듣고 혼자 친정 걱정을 한참 했다. '제목이 너무 후지다, 송중기가 어떻게 이런 드라마를 택했을까, JTBC 요즘 힘들다는데 어떡하냐. ' 이 드라마 제목? 최종화 시청률 26.9%로 비지상파 드라마 역대 2위를 기록한 초특급 화제작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
'테이크 원' 덕분에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는 '겸손'이다. 이젠 절대 어설픈 선입견으로 콘텐트를 비평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때려 박아 만든 '테이크 원'의 실패 이후 '덜어내기'라는 더 큰 교훈도 얻었다. 오프닝만 3개 만든 '테이크 원'과 달리 '흑백요리사'는 '오프닝 건너뛰기'를 할 수 없다. 아예 만들지 않았으니까.
두 거인의 등에 올라타서
백종원 대표는 새로운 사람과는 잘 작업하지 않는다. 본인 말이 조금이라도 다른 뉘앙스로 나갈까 봐 종이 매체 인터뷰는 웬만해선 안 할 만큼 까다롭다. 그런 백 대표를 음악 예능 위주로 경력을 쌓은 내가 어떻게 섭외했는지 궁금해들 한다.
대중은 넷플릭스의 영향력을 막연히 자본력으로 생각한다. PPL을 허용하지 않는 시스템인 데다 '솔로지옥'이나 '피지컬100' 등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의 스케일이 기존 국내 예능 수준을 훌쩍 뛰어넘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넷플릭스가 막대한 제작비를 주기 때문에 큰 스케일이 나오는 게 아니라, 구현하는 만큼의 제작비를 준다. 자본력을 무시할 순 없지만, 그걸 넘어서는 글로벌 1위 플랫폼이라는 브랜드의 힘이 콘텐트 퀄리티에 더 큰 영향을 줬다는 얘기다.
제작비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여기엔 함정도 있다. 돈만큼 책임이 따른다는 당연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제작비 많다고 꼭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건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흑백요리사' 관련 인터뷰를 할 때 얼마나 큰 세트에 얼마나 대단한 첨단 장비와 얼마나 많은 카메라를 동원했느냐는 등 돈 자랑은 가급적 하고 싶지 않았다. 시즌 1의 성공을 발판삼아 '흑백요리사' 시즌 2에선 스케일을 더 키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카메라 대수는 줄이고, 인력이나 장소도 더 효율적으로 쓸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
제작비 인플레로 제작 편수가 뚝 떨어진 건 드라마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능 판 역시 누군가 제작비를 무한정 늘리면 결국 제로섬 치킨게임으로 다 죽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TV는 올드해져서 신규 예능이 줄어드는 마당에 OTT마저 제작비 이슈로 새로운 시도가 점점 없어지면 안 되지 않나.
'진짜' '재미'를 찾아서
비단 '흑백요리사'뿐만 아니라 예능의 덕목은 누가 뭐래도 재미다. '아는 형님'(JTBC)처럼 말장난으로 웃기는 재미, 몰랐던 걸 알게 되는 재미,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 등 여러 종류의 재미가 있는데, 이와 아울러 불편함을 주지 않는 것도 아주 중요한 재미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불편하면 몰입이 깨져 아무도 보지 않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흑백 혼합 레스토랑 미션'에서의 갑작스런 팀원 방출과 백요리사 팀 선경 롱게스트 발언에 쏟아진 악플 문제 등은 제작진 입장에선 이유 있는 시도와 편집이었다 해도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반성한다.
반대로 흑수저 급식대가(이미영)가 백수저를 누른 2라운드 '1대1 흑백대전'을 통편집한 건 반성 아닌 해명을 하고 싶다. 이때도 판단 기준은 무조건 재미였다. 대결이 아무리 의미 있어도 시청자 보기에 재미있게 뽑혀야 살린다는 원칙을 따랐다. 제작 중에 출연한 셰프들 모두 "어려운 업계가 이걸 계기로 살아나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바람에 없던 책임감이 자꾸 생기려는 걸 계속 제어해야 했다. 외식업계 살리자는 취지의 프로가 되면 프로도 망하고 업계도 못 살린다. 제작진의 가치관이 은연중에 프로그램에 녹아들어야지 "이번엔 공정에 대해 다루겠어, 리더십을 보여주겠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건 진짜가 아니니까.
'흑백요리사'가 추구한 재미는 이렇게 '찐'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감독은 화면 속 세계를 조직하는 일종의 조물주라면 예능 PD는 관찰자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환경을 꾸며 출연자가 몰입하게 만들고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가령 두 심사위원 눈을 가렸던 블라인드 테스트와 함께 '흑백요리사'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준결승 '무한요리 지옥'의 두부 등장 장면이 대표적이다. 현장에서 출연자의 진짜 반응이 나와야 시청자도 그걸 고스란히 느낀다. 안 나온 반응을 편집으로 억지로 살릴 순 없다. 어떻게 놀라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경기도의 한 두부 공장에서 받아온 두부 1800모를 제작진 10여명이 1시간 넘게 손으로 하나씩 하나씩 쌓아 천장에서 내렸고, 성공했다.
출연자를 섭외할 때는 이런 '찐' 원칙에 더 철저했다. 요리는 당연히 잘해야 하지만 본인만의 스토리나 캐릭터가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봤다. 카메라 앞에서 필터 없이 자기를 내보일 수 있는 매력적인 사람, 억지 캐릭터 만들어 '척'하지 않는 사람, 에드워드 리에서 요리하는 돌아이(윤남노)에 이르기까지 그런 이들을 골라낸 게 '흑백요리사'의 성공 요인 아닐까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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