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후 자살’ 생존아동의 삶 ①혼란 속 남겨진 아이들 2014~2023년 판결문 분석 부모에 대한 양가적 감정에 혼란
부모는 자녀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고 돌봐야 하는 존재지만 ‘살해 후 자살’이라는 비극에서는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 과거 ‘동반 자살’로 불리던 이 범죄 유형은 부모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자신의 결정에 동의한 바 없는 자녀를 먼저 살해하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와 아동권리보장원의 ‘2023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23명이 이처럼 부모의 죽음에 동반된 ‘살해 후 자살’로 목숨을 잃었다.
국가통계는 ‘살해 후 자살’로 사망한 아동만 기록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미성년 자녀들은 부모의 살해 범죄 ‘미수’ 피해자가 된다. 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해치려 한 행위를 목격한 피해자인 동시에 그 자체로 아동학대 피해자지만 가해자인 부모와 인연을 끊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국민일보는 오는 19일 ‘아동학대 예방의 날’을 앞두고 국제아동권리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과 2014~2023년 살해 후 자살 판결문 102건을 분석하고, 올해 발생한 사건에 대해 경찰·소방·지방자치단체·아동보호전담기관 등을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생존 아동의 삶을 취재했다. 취재는 아동의 심리적 고통 등을 고려해 직접 인터뷰 대신 보호자나 보호기관 관계자를 통해 목소리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아동이 특정되지 않게 사건 개요 외에 신원 정보 등을 일부 각색했다.
다정했던 아빠의 마지막 모습
고등학교 1학년인 A양은 지난 3월부터 ‘아빠’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답하지 않는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소 아빠를 잘 따랐던 A양의 시간은 아직 그날에 멈춰 있다. 갑작스레 마주한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를 공포로 몰아넣은 건 다름 아닌 아빠였다.
A양 아빠 B씨는 사업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족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자주 하던 외식 횟수가 줄어들고, 작은 평수의 집으로 이사하면서 아내와 두 자녀는 어렴풋이 가계 상황이 좋지 않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지난 3월 B씨는 오랜만에 아이들에게 치킨을 시켜줬다. 초등학생인 둘째가 “피자와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해도 애써 모른 척하던 B씨였다. 그리고 며칠 뒤 B씨는 아내에게 ‘소염제’를, 두 아이에게 ‘감기약’을 건넸다. 수면유도제였다.
그날 오전 3시 가족이 모두 잠든 사이에 B씨는 혼자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잠에서 깬 아내가 이를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으면 안 된다. 나도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며 말렸다. 2시간여 설득 끝에 B씨는 “알겠다”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혼자 생을 마감하려던 B씨가 ‘가족 살해 후 자살’을 결심한 건 이때였다. B씨 아내는 5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은 본인이 떠난 뒤 남겨질 가족이 걱정돼 같이 떠나려고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잠에서 깬 B씨 아내가 아이들을 깨워 집 밖으로 도망치게 했다. A양은 “살려주세요”를 외치며 집 밖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다시 아빠 손에 끌려 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이를 목격한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면서 B씨는 살인미수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다정했던 아빠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A양은 사건 발생 이후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 상담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A양은 미술치료에만 겨우 응할 뿐이다. 수개월 동안 엄마가 곁에 없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마지막 순간, 자신의 손목을 잡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던 아빠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했다. A양의 엄마는 아이에게 “아빠가 너무 힘들어서 순간 그랬을 뿐, 정말로 가족을 해치려고 했던 건 아니다”고 설명해줬다고 한다.쉼터로 옮겨간 뒤 A양의 사례 관리를 넘겨받은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심리상담을 시도했지만 A양은 모두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엄마가 조심스레 아빠에 대해 물어봐도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송두리째 뽑힌 일상
A양은 미대 진학을 꿈꿔왔지만 이를 포기했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애써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A양 엄마는 “그날 이후로 하고 싶은 꿈도, 모든 걸 다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직후 A양은 재학 중이던 학교를 계속 다니며 일상 회복의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쉼터에 머물게 되면서 결국 전학을 갔다. 그날의 일은 A양에게서 꿈도, 친구도 송두리째 빼앗아간 셈이다.
A양의 아빠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최근 2심에서 징역 2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A양은 아빠가 출소한 뒤 함께 살지, 따로 살지 결정해야 한다. A양은 엄마를 통해 “아빠를 당장 만나는 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엔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고 전했다.
A양에겐 마음의 상처도 선명하지만 집이 아닌 쉼터에서 살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A양의 피해 회복을 지원했던 일선 경찰서 여성청소년과 경찰은 “가장이었던 A양 아빠가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택배 일을 하면서 재기를 해보려고 했지만 다시 수감되면서 A양 가족은 수입이 없어진 상황”이라며 “기초생활 수급과 긴급생계비 지원을 신청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경찰관은 직접 발품을 팔아 아동 관련 단체 지원을 수소문하거나 구청 장학금 등을 알아봐주기도 했다. 다만 모든 경찰서가 이렇게 하진 못하고 있다.
아빠의 출소 이후도 문제다. 이 경찰관은 “아빠가 출소해 같이 살게 될 때에는 ‘피해자 회복’ 성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지원이 모두 끊기게 된다”고 말했다.
트라우마에 짓눌린 삶
A양처럼 부모의 살해 후 자살에 동반된 피해 아동은 2014~2023년 기준 147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66명의 삶은 멈췄고, 81명은 생존해 A양처럼 일상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모가 사망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 경우까지 더하면 피해 아동 수는 더 늘어난다. 부모 죽음에 느닷없이 동반됐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아이들은 일반 아동학대 피해 아동보다 더 심각한 혼란 속에서 살고 있었다.
C군(14)은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살고 있었다. C군 엄마는 우울증을 앓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세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이혼 후 C군의 양육을 거부한 남편에 대한 원망이 커졌고, 자신이 떠나면 혼자 남겨질 아이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C군을 함께 데려가려 했다. 앞서 두 차례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세 번째 시도에서 엄마는 숨졌고, C군만 남게 됐다.
친모의 살인 시도와 자살 장면을 목격한 C군은 6개월 동안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C군 보호자 동의로 당시 C군을 보호하던 기관을 통해 국민일보가 입수한 심리평가 보고서에는 ‘개인적 상황과 엄마에 대한 경험을 묻는 질문에는 대답을 거부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트라우마로 인한 적응 문제와 우울 문제가 있고,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음’이라는 평가도 담겼다.
기관 담당자는 “C군은 친구들과 갈등을 겪거나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마주하면 ‘내가 죽어버리면 되지’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썼다. 엄마로부터 죽음을 무기로 쓰는 것을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며 “엄마가 생을 마감하자 사람들이 놀랐고, 본인도 트라우마를 겪을 정도로 무서운 경험을 했기 때문에 본인이 ‘죽겠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쩔쩔매고 힘들어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우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스스로 주변을 따돌리며 고립하는 경향도 나타난다고 한다. 엄마는 사망했지만 자신은 몇 차례 죽을 고비에서 살아 남았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식의 인지 부조화가 나타나고, 또래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거리 두기를 하며 세상과 고립된 삶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현실 인지에서 과대적 사고 가능성이 보인다’는 심리 분석이 내려졌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살해 후 자살은 아동의 생명을 빼앗는 극단적 아동학대”라며 “아이가 가장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부모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그런 위협을 겪을 경우 트라우마가 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아 남은 아이에게는 국가가 부모 역할을 대신 해줄 수 있도록 회복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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