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의 시시각각]박근혜에게 진 빚

최민우 2024. 11. 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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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정치부장

“김영선 좀 해줘라”는 명태균씨와의 통화 녹취가 공개된 지난달 31일, 윤석열 대통령은 ‘박근혜 판례’가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박 전 대통령이 2016년 총선에서 ‘진박’이 당선되게끔 여당 공천에 개입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2018년 재판 말이다. 돌이켜보면 과거 대통령은 여당 총재를 겸했기에 개입이 아니라 사실상 공천을 주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총선 당시 청와대에 상황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당정 분리를 천명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대통령의 공천 관여가 구시대 유물로 전락했지만, 선거에서 청와대 입김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관행에 철퇴를 내린 게 박근혜 선고였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2018년 박 전 대통령을 기소한 이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었으니. 일각에선 정황 증거밖에 없었던 박 전 대통령에 비해 직접 녹취가 나온 윤 대통령이 더 불리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 국정농단 수사로 각광받은 대통령
'탄핵 트라우마'에 기대고 있어
지지층 공포심만이 버팀목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한 뒤 환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20%가 깨졌다. 특히 보수의 심장 대구ㆍ경북(TK)의 지지율 18%가 뼈아팠다.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우파 대통령은 모두 영남 출신이었다. 윤 대통령은 비영남권(충청-서울)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영남의 전폭적인 지지세가 강하지 않았다. 이 같은 TK의 배타성, 이른바 ‘박근혜 정서’가 윤 대통령으로선 못내 아쉬울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것 때문이었을까. 김건희 여사는 취임 전 좌파 매체 서울의소리 기자와 두터운 친분을 나누었고, 친북 인사를 따로 만나다 디올백을 받았으며, 최근엔 탁현민을 만나려 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총선 뒤 한남동 라인은 ‘박영선 총리-양정철 비서실장’설을 흘렸고, 영수회담을 사전 조율했다는 비선(함성득-임혁백)은 “강성 지지층과 참모들의 반대 때문에 이재명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 “이 대표에게 불편한 인사는 비서실장 인선에서 배제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말을 소개했다. 이를 보고도 보수층이 윤 대통령을 마냥 지지할 수 있었을까.

명씨 녹취 공개에도 용산 대통령실은 일단 버티기 모드다. “공관위로부터 공천 관련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공천을 지시한 적도 없다. (명씨에게) 그저 좋게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낸 데 이어, 1일 국회 운영위에 출석한 정진석 비서실장은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 될 게 없는 내용”이라며 “진짜 대통령의 선거 개입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이라고 반박했다. 대통령 사과 요청이 빗발치는데도 용산이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건 ‘박근혜 반면교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8년 전 박 전 대통령은 태블릿 PC 보도 다음 날 최순실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사과했는데, 이후 정권은 급속히 무너졌다. 권력이란 함부로 등을 보이면 사정없이 물어뜯길 수 있는 법. 그렇다 해도 임기가 절반이나 남은 정부가 무작정 버틴다고 반전이 될지는 의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오른쪽), 박찬대 원내대표가 2일 서울 중구 서울역 일대에서 더불어민주당 주최로 열린 김건희 윤석열 국정농단 규탄·특검 촉구 국민행동의날에 참가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 민심은 얼추 이렇다. 윤 대통령이 꼴보기 싫지만 막상 탄핵에 대해선 거부감이 적지 않다는 것. 헌정 중단의 혼란상을 겪은 탓도 있지만, 특히 보수층은 8년 전 섣불리 탄핵에 방조 혹은 동조했다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보수 세력이 처참히 궤멸한 경험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박근혜 학습효과’로 지금 윤 정권이 무너지면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이 진행 중인 이재명 정권이 곧바로 들어설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를 용납할 수 없기에 “탄핵만은 결코 안 된다”는 정서가 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근혜 정권에 저항하다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고, 박근혜를 잡아넣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황태자로 승승장구했던 윤 대통령이 이제는 ‘박근혜 트라우마’에 기대 반전을 모색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지층의 상처 혹은 공포심을 인질 삼아 버티는 정권. 지금 윤석열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처참한 현실이다.

최민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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