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의 시시각각]박근혜에게 진 빚
“김영선 좀 해줘라”는 명태균씨와의 통화 녹취가 공개된 지난달 31일, 윤석열 대통령은 ‘박근혜 판례’가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박 전 대통령이 2016년 총선에서 ‘진박’이 당선되게끔 여당 공천에 개입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2018년 재판 말이다. 돌이켜보면 과거 대통령은 여당 총재를 겸했기에 개입이 아니라 사실상 공천을 주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총선 당시 청와대에 상황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당정 분리를 천명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대통령의 공천 관여가 구시대 유물로 전락했지만, 선거에서 청와대 입김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관행에 철퇴를 내린 게 박근혜 선고였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2018년 박 전 대통령을 기소한 이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었으니. 일각에선 정황 증거밖에 없었던 박 전 대통령에 비해 직접 녹취가 나온 윤 대통령이 더 불리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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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농단 수사로 각광받은 대통령
'탄핵 트라우마'에 기대고 있어
지지층 공포심만이 버팀목인가
」
지난 1일 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20%가 깨졌다. 특히 보수의 심장 대구ㆍ경북(TK)의 지지율 18%가 뼈아팠다.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우파 대통령은 모두 영남 출신이었다. 윤 대통령은 비영남권(충청-서울)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영남의 전폭적인 지지세가 강하지 않았다. 이 같은 TK의 배타성, 이른바 ‘박근혜 정서’가 윤 대통령으로선 못내 아쉬울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것 때문이었을까. 김건희 여사는 취임 전 좌파 매체 서울의소리 기자와 두터운 친분을 나누었고, 친북 인사를 따로 만나다 디올백을 받았으며, 최근엔 탁현민을 만나려 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총선 뒤 한남동 라인은 ‘박영선 총리-양정철 비서실장’설을 흘렸고, 영수회담을 사전 조율했다는 비선(함성득-임혁백)은 “강성 지지층과 참모들의 반대 때문에 이재명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 “이 대표에게 불편한 인사는 비서실장 인선에서 배제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말을 소개했다. 이를 보고도 보수층이 윤 대통령을 마냥 지지할 수 있었을까.
명씨 녹취 공개에도 용산 대통령실은 일단 버티기 모드다. “공관위로부터 공천 관련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공천을 지시한 적도 없다. (명씨에게) 그저 좋게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낸 데 이어, 1일 국회 운영위에 출석한 정진석 비서실장은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 될 게 없는 내용”이라며 “진짜 대통령의 선거 개입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이라고 반박했다. 대통령 사과 요청이 빗발치는데도 용산이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건 ‘박근혜 반면교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8년 전 박 전 대통령은 태블릿 PC 보도 다음 날 최순실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사과했는데, 이후 정권은 급속히 무너졌다. 권력이란 함부로 등을 보이면 사정없이 물어뜯길 수 있는 법. 그렇다 해도 임기가 절반이나 남은 정부가 무작정 버틴다고 반전이 될지는 의문이다.
현재 민심은 얼추 이렇다. 윤 대통령이 꼴보기 싫지만 막상 탄핵에 대해선 거부감이 적지 않다는 것. 헌정 중단의 혼란상을 겪은 탓도 있지만, 특히 보수층은 8년 전 섣불리 탄핵에 방조 혹은 동조했다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보수 세력이 처참히 궤멸한 경험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박근혜 학습효과’로 지금 윤 정권이 무너지면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이 진행 중인 이재명 정권이 곧바로 들어설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를 용납할 수 없기에 “탄핵만은 결코 안 된다”는 정서가 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근혜 정권에 저항하다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고, 박근혜를 잡아넣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황태자로 승승장구했던 윤 대통령이 이제는 ‘박근혜 트라우마’에 기대 반전을 모색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지층의 상처 혹은 공포심을 인질 삼아 버티는 정권. 지금 윤석열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처참한 현실이다.
최민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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