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트럼프 당선될 경우 주한 미지상군 철수 추진할 수도

2024. 11. 5.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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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과 따라 달라질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4년마다 다가오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내의 변화는 물론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국가들, 그리고 미국의 동맹국들에도 미 대선의 결과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후보와 정당에 따라 미국의 대외 정책에 다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전 세계는 선거 결과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주한미군 감축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한미 간 동맹 관계 흐름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미국의 대선 결과는 원조정책과 안보정책 등 한국경제와 안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민주당이 재정을 확장하고 국제적 무역협력을 넓히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책을 추진했다면, 공화당은 예산의 축소와 자국 내 산업의 진흥을 좀 더 강조하면서 고립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 민주 ‘재정 확장 및 적극 개입’ vs 공화 ‘재정 축소 및 고립주의’
아이젠하워·닉슨·부시 등 공화당 집권 때 주한 미군 축소 움직임
케네디·존슨·클린턴 등 민주당 때는 원조 확대 및 적극 개입정책
누가 당선되든 국가 안전 위한 모든 대책과 옵션 갖추고 있어야

1953년 시작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핵심 정책은 재정 축소였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국방비가 3배 이상 증가한 상황에서 취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비 축소를 통한 재정균형을 주요한 목표로 세웠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의 전쟁 중지, 그리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위해 한국을 중립화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한반도와 대만해협의 위기로 인해 주한미군 철수보다는 감축 정책으로 전환하였지만,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감축도 추진했다. 1954년의 한미합의의사록으로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는 대신 한국군 유지비용을 미국이 제공하기로 한 만큼 한국군의 감축은 미국의 재정 축소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비용 축소를 위해 주한미군 감축과 전술핵 설치가 결정되었다. 아울러 1958년부터 미국의 원조가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제7사단을 철수시킨 닉슨 대통령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늘어난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공산주의 국가와의 화해를 추진하는 데탕트 정책을 실시했다. 냉전의 긴장이 줄어들면 군축이 가능하고, 이는 미국 정부의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었다.

괌 독트린을 통해 베트남과 아시아 국가에서 미군의 철수를 추진했다. 한반도에서 남북대화를 지지했고,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베트남에서 철군하더라도 중국이 북베트남을 지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5년까지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 계획을 세웠고, 한국 정부와의 사전 협의 없이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했다.

닉슨 행정부는 한국의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있는 동안 주한미군 규모에 변화가 생길 경우 사전에 한국 정부와 의논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미 간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한미군 감축으로 한국군의 현대화 사업을 지원했지만, 대부분의 원조는 1975년 종료되었다. 미국 내 산업 진흥을 위해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면직물 쿼터제를 도입했으며,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을 실시했다.

부시 대통령의 전술핵무기 철수

1991년 7월 2일 오전 백악관 뜰에서 열린 공식 환영 행사에서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미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 내 자동차산업 보호를 위해 일본 자동차에 중과세를 했던 레이건 대통령에 이어 1989년 취임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이전 정부 시기 군사력 재건을 통한 소련 압박 정책으로 인해 늘어난 재정을 감축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해외에 주둔하는 미군 기지의 재편을 추진했다. 이는 소련과 동유럽 공산정권의 몰락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탈냉전으로 인해 냉전 상황과는 다른 해외 미군 기지의 재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 부시 행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잘 진행되는 듯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인한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 작전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엄청난 비용을 써야 했지만, 실제로 걸프전의 비용의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출했다. 해군, 공군의 작전과 달리 미 지상군의 걸프전은 4일 만에 막을 내렸다.

부시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1991년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를 발표했고, 이는 남북기본합의서, 남북비핵화선언, 그리고 남북 유엔동시가입으로 이어졌다. 1992년에는 한중 수교가 있었고, 주한미군사령관이 갖고 있던 한국군 평시 작전권의 한국정부로의 이양이 합의되었다.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측 대표도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되었다. 닉슨 행정부가 하지 못했던 일을 부시 행정부가 했던 것이다.

아들 부시 대통령 역시 아버지가 했던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을 추진했다. 9·11 테러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군비 축소는 쉽지 않았지만, 주한미군 감축과 함께 전시 작전권을 한국 정부로 이양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북한 핵문제가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었지만,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6자회담을 통한 압박 전략을 추진했다. 북핵실험이 성공하자 냉각탑 폭파와 뉴욕 필하모니의 평양연주가 이루어졌다.

케네디 정부와 국제개발처 설립
이러한 공화당 정부와 달리 민주당 정부는 대외적으로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루스벨트 행정부와 트루먼 행정부는 해외 전쟁에 적극 개입하는 정책을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의 경제가 가장 호황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사비 증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60년대 초 케네디 정부는 대외 원조를 대폭 확대하였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국제개발처(USAID)로 일원화되었다. 전쟁과 식민지 경험으로 피해를 본 지역에 대해 잉여농산물을 이용한 구호와 복구가 중심이었던 1950년대와 달리 장기간의 계획을 갖고 차관을 공여하는 재건 원조로 변화하였다.

베트남의 상황이 악화하고 있었지만, 케네디 정부에 이은 존슨 행정부도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부대를 파병하면서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을 시작했다. 여기에 아시아 동맹국들의 군대 파병을 요청했으며, 그 모든 비용을 미국이 충당했다.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 있는 한 유엔군을 더 이상 동원할 수 없었다.

존슨과 베트남, 클린턴과 북한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 1966년 10월 방한한 린든 B. 존슨 미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마치고 이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베트남 전쟁 기간 존슨 정부는 동맹국들에 대해 무역 혜택을 제공했다. 한국을 비롯해서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던 필리핀과 태국은 전선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시장에서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존슨 행정부가 끝나자마자 미국 의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미국 정부의 돈을 받았던 한국을 비롯한 참전국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경제에서의 적극적인 개입 정책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더 잘 드러났다. 1970년대 후반 민주당 카터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이란, 니카라과에서의 혁명,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발생했다는 판단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는 중동뿐만 아니라 발칸반도에 적극 개입했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한 핵시설 타격계획도 세웠다.

1994년 북한과 제네바 합의를 맺고 경수로 건설과 중유 제공을 하는 대신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또한 WTO라는 새로운 세계 무역기구를 만들어 전 세계의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WTO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기구가 아니었지만, 시장의 확대를 위해 이를 추진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들 부시 행정부 시기에 무너진 미국의 소프트파워와 동맹관계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대부분의 정책은 미국 내에서의 의료보험을 비롯한 사회복지 정책의 강화에 더 초점이 맞추어졌고, 이란·쿠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한반도 문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북한 및 동맹 문제에 있어서 최대한 원칙을 지키려 했다.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5일(현지시간) 미국 대선에서 맞붙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카멀라 해리스(왼쪽) 부통령과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P=연합뉴스

이제 곧 미 대선 결과가 나올 것이다. 누가 되든 과거에 있었던 민주당과 공화당 정책의 틀을 이어갈 것이다. 특히 트럼프의 경우 미국 정부의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해외에 대한 개입을 축소하는 것은 물론, 해외 미군의 주둔 비용 중 동맹국 부담을 급격히 증가시킬 것이다. 이미 한국과 일본, 유럽은 이를 경험한 바 있다. 궁극적으로는 미국 정부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부시 행정부와 유사한 주한 미지상군 철수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도 크다.

아울러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바로 종결하겠다고 한 약속도 지키려 할 것이다. 이는 북한의 러시아 파병을 계기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하려는 한국 정부의 시도와 서로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이 재집권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미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 또한 민주당이 항상 공화당과 달랐던 것은 아니다. 케네디와 카터 행정부 시기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추진했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미·중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민주당 정부의 경제 정책도 과거와는 달리 공화당과의 교집합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누가 당선되든 한국 정부는 모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북한-러시아가 더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국가와 국민 안전을 위한 모든 대책과 옵션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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