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부분은 상상하라…“표현 아꼈다, 해석은 관객 몫”

이은주 2024. 11.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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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91193’, 1991, 캔버스에 유채, 218.2x291㎝. [뉴시스]

50여 년 전 어느 날. 청년 미술가 이강소는 선술집을 찾았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낡고 닳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선배와 마주 앉아 있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전에 왔던 사람들이 지금 없듯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중엔 없겠구나···’.

이후 그곳에 있던 낡은 탁자와 의자는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 퍼포먼스 작품으로 놓였다. 제목은 ‘소멸-화랑 내 선술집’(1973). 당시 화랑을 찾은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행위가 작품이 됐다. 그 모습은 몇 컷의 사진으로 남아 지금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벽에 걸렸다. 또 미술관 로비(서울박스)엔 당시 선술집처럼 메뉴 간판과 탁자, 의자들이 놓였다. 현재 그곳에서 막걸리를 마실 순 없지만, 관람객은 그곳에서 잠시 쉬다가 자리를 뜬다. 50년의 세월을 지나 새롭게 이어진 ‘소멸’의 풍경이다.

현대미술가 이강소(81)의 개인전 ‘이강소: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지난 1일 개막했다. 전시 제목이 ‘바람이 물을 스칠 때’란 뜻의 ‘풍래수면시’다. 송나라 문인 소옹(邵雍,1011~1077)의 시 ‘청야음’(清夜吟)에서 따왔다. 새로운 세계와 마주쳐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있음과 없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함축해 보여준다.

1973년 설치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멸’. [뉴시스]

이강소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신체제 창립전’(1970), ‘71 AG전:현실과 실험’(1971) 등 현대미술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실험 미술 전시에 참여했다. 약 100점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회고전이라기보다는 작가가 평생 천착한 질문과 실험의 요체를 드러내는 주제전에 가깝다. 조각·설치·판화·영상·사진 등 매체는 다르지만, 그의 작품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존재하는 나와 세계의 존재, 그리고 지각(知覺)에 대한 끈질긴 의심, 즉 회의(懷疑)다. 특히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보인다는 생각은 작가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질문으로도 이어졌다.

이를테면 1970년대 비디오 작업 ‘페인팅 78-1’(1978)은 작품에서 작가를 최대한 지우는 작업이었다. 카메라 앞에 유리를 세워 놓고 유리를 붓으로 칠하는 장면을 반대편에서 촬영한 것으로, 작품이 완성될수록 화면 속에서 작가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는 과정을 담았다.

작가가 ‘만들어지는 조각’이라고 칭하는 조형 작품도 ‘작가 지우기’의 연장선에 있다. 그의 조각은 깎아서 만드는 게 아니라 테라코타 등의 재료를 던지는 행위를 통해 완성한다.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대신 재료의 중력과 작업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무게를 뒀다.

깨진 돌과 깨어지기 전의 돌이 담긴 사진, 판화, 드로잉, 회화. 현실에 대한 의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뉴시스]

작가가 뒤로 물러서고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회화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회화 중 하나는 세로 2m, 가로 3m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에 거친 붓선으로 사슴을 그린 ‘무제-91193’다. 여러 각도에서 본 사슴의 모습이 중첩된 것처럼 표현돼 있다. 이에 대해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존재는 불안정하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작가 자신의 철학을 회화적 실험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강소는 ‘오리 작가’로 불릴 만큼 그의 작품엔 오리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가 캔버스에 드러내 보인 것은 오리 그 자체이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자 에너지, 즉 기(氣)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생명체의 상징에 가깝다.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완전히 표현을 안 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표현을 아낀다”며 “그럴수록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기 경험을 떠올리고 상상을 하며 작품을 보게 된다”며 “현대미술은 그렇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구조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번 전시는 국내외 미술계에서 개막 전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지난 9월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거장들이 소속된 오스트리아 기반 글로벌 갤러리 타데우스로팍의 전속 작가가 되면서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이 더 쏠리고 있다. 전시는 내년 4월 13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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