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유증 폭탄’ 자충수 되나
지난 10월 30일 오전 11시 21분.
고려아연발 기습 공시가 뜨자 증시가 출렁였다. 2조5000억원 규모 일반공모 유상증자 공시였다. 주당 150만원 넘는 주식을 원하는 누구에게나(일반공모) 67만원에 주겠다는 것. 공시 직후 코스피 시가총액 10위 고려아연 주가는 하한가(-30%)로 추락했다. 고려아연 스스로 주가를 반 토막 냈다는 성토가 쏟아졌다. 점심을 앞둔 여의도 증권가는 물론 금융당국에서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고려아연의 기습적인 유증이 경영권 분쟁에 미칠 영향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유증 공시 이전 경영권 분쟁 ‘1라운드’는 뚜렷한 승자 없이 일단락됐다. 이 때문에 향후 과반 의결권 확보를 위한 ‘2라운드’를 예상했던 터다. 하지만, 이례적인 대규모 증자로 금융당국이 개입할 빌미가 되면서 경영권 분쟁은 국면 전환을 맞게 됐다. 재계에선 최 회장이 ‘회심의 카드’로 꺼낸 유증이 도리어 자충수가 됐단 지적이 나온다.
사실상 경영권 방어 목적
지난 10월 30일 고려아연은 긴급 이사회를 열고 조 단위 유상증자를 기습 결의했다. 이사회 직후 고려아연은 보통주 373만2650주에 대한 일반공모 유상증자를 진행한다고 공시했다. 이번 유상증자 물량은 자사주를 제외한 전체 발행 주식 20%에 해당한다. 조달 자금 대부분은 채무상환(2조3000억원)에 쓰인다. 뜻밖 유증 소식에 고려아연 주가는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
이번 유증은 MBK 연합 지분을 희석시켜 지분율을 낮추는 동시에 우리사주조합 등 우호 지분을 늘려 지분 격차를 줄이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이 주식을 우리사주조합에 넘기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고려아연은 모집 주식 중 80%에 대해 일반공모를 실시하고 나머지 20%는 우리사주조합에 배정한다. 소각할 자사주 물량을 고려하면 약 4%를 최 회장 ‘백기사’가 될 수 있는 우리사주에 넘기겠단 얘기다.
이번 증자 성공 땐 MBK 연합 의결권 지분율은 기존 43.9%에서 36.4%로 희석된다. 최 회장 측 우호 지분도 40.4%에서 33.5%로 낮아지지만, 우리사주 물량이 모두 최 회장 편에 서면 우호 지분은 36.9%로 오른다. MBK 연합을 0.5%포인트, 근소한 차로 앞설 수 있다. 기존에 보유 중인 자사주 1.4%를 우리사주에 추가로 넘겨 의결권을 살리는 방안도 거론된다.
고려아연은 MBK 연합 견제 장치도 뒀다. 고려아연은 이번 유증에서 한 청약자(특별관계자 포함)가 최대 3%만 배정받을 수 있게 상한을 뒀다. MBK가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지분을 최소화하도록 미리 선을 그은 것. 또 고려아연은 기존 우호 지분 외에 추가로 ‘숨은 우호 지분’을 1% 안팎 늘릴 가능성을 기대한다. 이렇게 되면 양측 지분율 격차를 더 벌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유증이 최 회장 측에 자충수가 될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최 회장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를 공개매수하겠다며 빚을 낸 뒤 그 돈을 갚겠다고 주주에게 막대한 돈을 빌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우호 세력 지분도 대거 희석돼 가치 하락이 불가피하다. 고려아연 기타 비상임이사인 현대차 측 인사가 유증 결의 이사회에 불참하는 등 불편한 기류가 역력하다. 최 회장 스스로 자가당착을 자초했단 지적도 나온다.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며 자사주 공개매수를 벌이더니 느닷없는 유증으로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운용업계 관계자는 “최 회장 측에 우호적이던 일반주주 여론도 다 돌아설 판”이라고 성토했다.
금감원, 미래에셋 현장검사
MBK, 가처분 신청 낼 듯
금융당국 경고로 이번 유증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금감원은 주관사 검사, 정정신고서 제출 요구 검토 등으로 대규모 증자 계획에 사실상 제동을 걸었다.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지난 10월 31일 기자간담회에서 “고려아연이 공개매수 기간 유상증자를 추진한 경위 등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살펴보고 부정한 수단 또는 위계를 사용하는 부정거래 등 위법 행위가 확인되면 해당 회사, 관련 증권사에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고려아연에 정정신고서 제출 요구도 검토 중이다. 정정신고서 제출 요구는 금융당국의 철회 의지 피력으로 해석된다. 금감원은 앞서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합병 계획과 관련 2차례에 걸친 정정신고서를 요구해 이를 철회시켰다.
무엇보다 금융당국에서는 최 회장 측이 공개매수신고서 제출 시점에 ‘유증 폭탄’을 사전 계획했을 가능성을 의심한다. 지난 10월 11일 고려아연은 자사주 공개매수가를 올리며 낸 정정 공개매수신고서에서 “공개매수 이후 회사 재무 구조에 변경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장래 계획을 수립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려아연이 유증 증권신고서에 첨부한 기업실사보고서에 따르면, 주관사 미래에셋증권은 지난 10월 14일부터 29일까지 고려아연 기업실사를 벌였다. 정정신고서 제출 시점에 이미 대규모 유증을 계획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의도를 감췄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공개매수 기간 중 67만원의 유증 계획을 알렸다면 기존 주주는 모두 89만원의 자사주 공개매수에 청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금융감독원이 이번 유증 주관사 미래에셋증권 현장검사에 착수한 것은 이런 의구심 때문으로 풀이된다. 자본시장법 전문 변호사는 “정정신고서 제출 시점에 유상증자를 계획했으면서도 이런 계획을 의도적으로 감췄다면 자본시장법상 부정 거래이자 공개매수신고서 허위 기재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당장 영풍·MBK 연합은 유증 공모를 막기 위한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과 함께 주주 여론 결집에 나선다. MBK 연합은 “이번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결정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법적 수단을 강구할 것이며 최 회장과 이사진들에게 끝까지 그 책임을 묻고자 한다.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결정은 기존 주주들과 시장 질서를 유린하는 행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MBK 측이 가처분 신청에 나서더라도 인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법조계 시각이 나뉜다. 이번 유증이 앞서 KCC와 현대엘리베이터 간 경영권 분쟁과 유사하지만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 법원은 지난 2003년 KCC와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간 경영권 분쟁 사례에서 경영권 방어 목적 일반공모 유상증자는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고려아연의 이번 증자는 신주 발행 물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청약 제한 조건은 완화했다는 점에서 동일선상 비교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법조계 관계자는 “명분 싸움에서는 밀리더라도 채무상환을 위해 자금 조달이 필요하고 유증을 택했다면 법리적으로는 책임을 묻기 애매할 수 있다”고 봤다.
시장 일각에서는 이번 유증으로 최 회장 측이 국민연금 지지를 얻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양측 의결권 확보 비율에 비춰 캐스팅보트를 쥔 쪽은 국민연금이다. 운용업계 관계자는 “공개매수신고서 제출 시점과 유증 실사 시점을 비교해보면 공개매수로 주주들에게 돈이 나가기 전부터 실질적으로는 주주 주머니를 빌려 공개매수 대금을 갚을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기금 수익률 제고를 의결권 행사 핵심 잣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국민연금 지지를 얻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3호 (2024.11.06~2024.11.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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