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통령이란 자리를 생각한다
2012년 나는 한 칼럼에서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란 말을 쓴 적이 있다. 민주화 시대의 우리 정치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란 새 정부에 가졌던 기대가 빠른 속도로 실망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국정운영 지지율 변화에 잘 나타난다. 정부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집권 초반기의 높은 지지율은 1~2년 안에 30~40%대로 하락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낮은 지지율로 남은 기간을 견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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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의 지지율, 국정의 위기 드러내
대통령에 대한 신뢰 위기 주목해야
국내외 상황은 냉철한 리더십 요구
대통령 자리에 걸맞은 쇄신 내놔야
」
이 ‘짧은 열광과 긴 환멸의 사이클’은 보수는 물론 진보 정부 모두에게 숙명과 같은 조건이었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최저 지지율이 30%를 넘긴 사례는 없었다. 구체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12%, 김영삼 대통령은 6%, 김대중 대통령은 24%, 노무현 대통령은 12%, 이명박 대통령은 17%, 박근혜 대통령은 4%, 문재인 대통령은 29%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6%와 박근혜 대통령의 4%는 각각 외환위기와 국정농단 사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독자들은 내가 왜 국정운영 지지율을 꺼내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졌다. 지난 1일,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국갤럽 조사에서 19%를, 문화일보 조사에서 17%를 기록했다. 오는 10일 집권 후반기를 맞이하기 전에 20%에 미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보수의 응답마저도 ‘잘못하고 있다’(57%)가 ‘잘하고 있다’(33%)를 압도한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다. 국정의 위기이자 대통령의 위기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헌법 제66조 1항이다. 대통령은 국가 운영을 주도하는 행정가이자 국민 의사를 대의하는 정치가다.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만큼 대통령의 권력 행사에는 엄중한 책임이 뒤따른다. 그러기에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헌법 제66조 2항이다. 대통령이란 본래 이런 자리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하나가 헌법에 드러난 명시적 규정이라면, 다른 하나는 드러나지 않은 묵시적 신뢰다. 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국민의 한 사람인 나의 삶을 지켜준다는 신뢰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본 조건이다. 이 신뢰의 다른 이름이 사회사상가 막스 베버가 말한 국가의 ‘정당성’이자,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정치의 ‘헤게모니’다. 대통령의 위기는 정당성의 위기이자 헤게모니의 위기다.
문제는 지난 4·10총선 이후 대통령 지지율이 한국갤럽 조사를 기준으로 30% 아래를 계속 기록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국민 다수의 생각이 실망에서 환멸로 변화했고, 그 환멸이 구조화돼 왔음을 함의한다. 때 이른 환멸의 심화는 최근 ‘통치의 사실상 불능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의욕적으로 앞세운 노동·교육·연금개혁은 물론 ‘의정 갈등’ 해결 역시 길을 잃어온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2024년 현재 우리나라가 놓인 지구적 환경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시화된 신냉전 질서로의 전환, 반도체 전쟁 등에서 관찰되는 경제적 패권주의의 강화, 그리고 북-러 밀착과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의 증가 등은 무엇보다 대통령의 냉철하고 사려 깊은 리더십을 요구한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 맞서 정당성과 헤게모니가 허약한 정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의 우려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
대통령과 국정의 위기가 계속될수록 야권과 시민사회의 비판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특검은 물론 임기 단축 개헌과 탄핵까지 여러 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정부가 부분적인 쇄신에 그칠 경우 현재 마주한 정당성의 위기와 통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 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 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 제도라는 사실이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의 말이다. 국회와 더불어 정치의 중심을 이루는 대통령의 역할에 담긴 중요성을 일러준다. “권력과 권력 행사에 대한 엄격한 책임이야말로 좋은 정부(good government)의 필수적인 요소다.”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말이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 권력은 권력을 위임한 국민으로부터 거부될 수 있다.
대통령은 행정가이자 정치가다. 좋은 정부, 좋은 정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마땅한 책무다.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시간 또한 많지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이 민심을 직시하고, 국가의 대표라는 대통령의 자리에 걸맞은 전면적인 쇄신 방안을 내놓길 기대하는 이, 결코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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