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녹취록의 시대

양성희 2024. 11. 4.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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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상대를 믿고 무심코 한 모든 말이 녹음되고, 공개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연일 누군가의 녹취록이 터진다. 생생한 육성의 ‘빼박 증거’니, 누구는 나락 엔딩을 맞고 누구는 기사회생한다. 지난해 중소기획사 아이돌을 향한 탬퍼링(멤버 빼가기) 논란이 있었던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사태도, 탬퍼링을 암시하는 통화 녹취가 없었다면 중소기획사의 흔한 비극으로 끝날 일이었다. 갤럭시 폰의 자동 통화녹음 기능이 기획사 대표의 목숨을 구했다는 우스개가 나돌았다. 이전에는 커튼 뒤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던 모든 일이 녹취록으로 대중에게 쉽게 까발려지는 시대다.

「 정국 뒤흔드는 대통령 관련 녹취록
부적절한 처신 국민 실망과 분노 커
상황 타개 위한 엄정한 현실 인식을

녹취록은 정치의 흐름도 바꾼다. 그 유명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백악관 집무실 안 모든 대화와 전화 통화를 녹음하는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마무리됐다. 닉슨의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백악관 인턴인 모니카 르윈스키가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말한 통화 녹음이 공개된 게 클린턴 대통령의 ‘지퍼게이트’였다.

휴대폰 통화 녹음이 손쉬워지면서 상황은 더욱 숨 가빠졌다. 여러 정치인이 막말 녹취 공개로 인상을 구겼다.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도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의 휴대폰 녹취에서 시작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형수 욕설 녹취’는 그의 비호감 이미지를 굳힌 결정적 계기였다. 2022년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동의 없는 대화 녹음을 처벌하는 ‘대화녹음금지법’을 발의했는데, ‘진실증명금지법’ ‘막말비호법’이란 비판만 받았다. 개인으로야 사생활 보호가 안 되는 ‘녹취 공포’를 느낄 수 있지만, 공인·권력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녹취록에 관해서라면 이 정부는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같다. 대선후보자 시절 여사의 ‘서울의 소리 7시간 녹취’부터 이런저런 녹취와 문자 공개가 끊이지 않고, 그를 통해 부주의하고 부적절한 처신이 드러났다. ‘서울의 소리 7시간 녹취’ 속 여사는 후보의 배우자라기보다는 대선 캠프의 수장 같았다. 몰카 함정 취재 논란이 있지만, 여사가 명품백을 건네받는 장면과 카톡 대화도 공개됐다. 김대남 전 대통령실 비서관의 녹취는 더 충격적이었다. 대통령의 사람이란 이가 대통령에게 멸칭을 쓰고, 일신의 영달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떠벌렸다. 이런 게 윤석열 정부와 용산의 민낯이라는 점에 많은 국민이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압권은 한 달 넘게 정국을 뒤덮고 있는 명태균 녹취록이다. 급기야 공천 개입을 암시하는 대통령-명태균 통화 녹취가 공개됐다. 대통령실은 취임 전 당선인 신분 때의 일이니 아무 법적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으나, 민주당은 취임 이후 두 사람의 통화 녹취도 확보했다고 으름장을 놨다. 예의 ‘여사 리스크’에 민주당의 ‘대표 방탄용 탄핵 공세’가 거세질 텐데, 앞으로 또 어떤 녹취가 터질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녹취를 통해 우리는 대통령 내외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다.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유지만 대통령이라는 공적인 자리에 맞게 말을 가리고 사람도 가려서 만나야 한다는 공적 마인드를 찾기 어렵다. 요즘은 평범한 사인들도 내 통화가 녹음·공개될 수 있다고 의식하기 마련인데 이 조심성 없음은 자신감인가, 개념 없음인가. 윤 대통령은 사인 시절 번호 그대로의 개인 폰으로 장차관 등과 통화하며 업무를 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도청·해킹 등 취약한 보안 우려에, 기록이 남지 않는 개인 폰으로 공무를 보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었다.

아무리 휴대폰 없이 못 사는 세상이라지만 대통령 내외의 휴대폰이 핵폭탄이 돼버린 난센스 같은 상황이다. 이 와중에 일부 친윤들은 ‘녹취록 편집’ 주장을 하고 “부당하게 정권을 비판하는 음모를 막아내기 위해 뭉치자”(추경호 원내대표)고 외치고 있다니 안드로메다급 현실 인식이 기가 막힌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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