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 주주는 호구도 물주도 아니다
주주는 호구다. 고려아연이 지난달 30일 임시 이사회에서 발표한 유상증자 계획은 이 말의 동의어 같았다. 고려아연은 현재 주가에 30%의 할인율을 적용한 주당 67만원(예정가)에 약 373만주를 유상증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조달할 자금은 2조5000억원으로, 이 중 2조3000억원을 차입금 상환에 쓰겠다고 했다. 빌린 돈을 갚겠다는 것인데, 문제는 자사주 공개매수를 위해 낸 빚이라는 데 있다.
고려아연은 영풍·MBK파트너스 연합과 경영권 분쟁 속 약 362만주(발행주식의 17.5%)의 자기주식을 공개매수한 뒤 소각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지난달 23일까지 주당 89만원에 204만주를 매입했다. 총 1조8156억원을 썼다. 주식 매입 자금은 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공개매수가 끝난 일주일 뒤, 빌린 돈을 갚기 위한 유상증자 계획을 밝힌 것이다.
증자의 변은 재무구조 개선의 필요성이다. 고금리 차입금을 갚지 않으면 재무 구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공개매수 당시 부각된 재무부담에 대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던 입장과는 결이 다르다. 결국 경영권 방어를 위해 회삿돈을 쓴 것으로도 모자라 주주 돈을 당겨 쓰겠다고 손을 벌린 모양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할 수는 있다. 유상증자 자체를 위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려아연의 ‘기습 유상증자’ 계획은 자본시장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유상증자를 통한 신주 발행 결의는 차입으로 89만원에 자사주를 매입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67만원에 주식을 발행하는 자해전략으로, 회사의 주인이 주주라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라며 “자본시장 관점에서 시장 교란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감독원이 불법행위가 확인되면 엄정대응하겠다고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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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사주 매입 위한 차입금 갚으려
대규모 유상증자하려는 고려아연
“주주 가치 훼손, 시장 교란 행위”
」
불법행위가 없었더라도 주주들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고려아연은 자사주 매입에 나서며 주주권익 보호와 주주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기업 가치는 그대로인데 자사주 매입으로 유통 주식 수가 줄어드는 만큼 기존 주주 입장에서는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올라가는 효과가 있어서다. 하지만 공개매수 마감 일주일 만에 시장에 물량을 쏟아내겠다고 천명하며 입장은 돌변했다. 유상증자로 발행할 신주는 소각 대상 자기주식을 제외한 발행주식 수의 20%에 달한다. 주주 가치 희석 우려에 발표 당일 고려아연 주가는 30% 폭락하며 하한가를 맞았다.
고려아연 이사회 의장인 최윤범 회장은 “소액주주와 일반 국민 등 다양한 투자자가 주주로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 주주 기반을 확대하고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일반 공모 방식으로 유상증자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고려아연은 소유 분산을 통해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선뜻 주주로 참여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적지 않다.
국가 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국민기업’이라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유상증자 방안을 살펴보면 경영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포석임을 배제할 수 없다. 경영권 분쟁 중인 대주주 지분 약화를 위한 이른바 ‘물타기’의 성격이 강해서다. 현재 영풍·MBK파트너스와 최 회장 및 우호 지분 차이는 3%포인트 정도다. 박빙의 대결 구도 속 이번 유상증자는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가 아닌 처음부터 일반공모(모집 주식의 80%)로 진행된다. 게다가 신규 발행 주식 중 20%는 우리사주에 배정하게 돼 있다. 이렇게 되면 고려아연 우호 지분은 3~4%가량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 ‘특별관계자 3% 청약 제한 룰’까지 뒀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이 일반공모에 참여해도 많은 지분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금감원은 해당 조항도 들여다본다는 입장이다. 주주가 3%를 초과해 청약할 수 없게 물량을 제한한 사례는 있었지만, 특별관계자로 제한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독립투자 리서치 플랫폼 스마트카르마는 고려아연의 기습 유상증자 계획을 ‘최악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사례’로 꼽았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일반 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주주의 돈을 쌈짓돈처럼 여기는 행태 때문이다. 기업 밸류업을 위한 각종 시도에도 ‘국장에는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투자자의 냉소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각종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이래서 상법에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를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드센 것도 결국 기업이 자초한 것이다. 주식회사의 주주는 물주도 호구도 아닌 회사의 주인이다. 그걸 잊으면 회사는 존재할 수 없다.
하현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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