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쇼 다음 날, 삼성 총수의 일정 [김선걸 칼럼]

김선걸 매경이코노미 기자(sungirl@mk.co.kr) 2024. 11. 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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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 아키오 토요타 회장이 레이싱카로 화려한 ‘쇼런(Show Run)’을 선보일 때 옆좌석에는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타고 있었다. 세계 완성차업계에서 토요타는 1위, 현대차는 3위로 험하게 경쟁하는 사이다. 생존을 위해 어제의 적과도 손잡는 냉혹한 경영자들의 세계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재용 삼성 회장도 보였다. 삼성은 스피드웨이 운영사다. 전장(자동차 전자장비) 사업도 확대하고 있다. 토요타 회장과 조우는 도움을 줄 것이다.

이날 이 회장 관련 기사의 댓글은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주가 5만원대 만들고 거기서 뭐하냐” “지금 남의 잔치에서 웃을 때냐” 유가 꽤 됐다. 몇 달 전만 해도 ‘10만전자’ 운운하던 삼성전자 주가는 5만원대로 주저앉았다. 한국식 ‘오너 경영’에서 책임을 총수에게 돌리는 건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다음 날인 28일 이 회장은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서울고법 형사13부가 진행한 ‘부당합병 의혹’공판이다. 오후 2시부터 6시 30분까지 내내 법정에 앉아 있었다. 재판에 들어가면 피고인인 이 회장은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을 지켜보는 것뿐이다.

삼성 공장에서 화재가 나도, 경쟁사가 첨단제품을 발표해도, 시급한 투자 결정이 필요해도 뭘 할 수 없다. ‘묵언수행’으로 반나절을 보냈다.

이런 생활이 8년째다. 2016년 특검 조사를 받기 시작한 이후 소환-구속-석방-재구속을 거쳤다. 구속 기간만 19개월이다. 주주가 500만명이 넘고, 한국 GDP의 20%를 차지하는 삼성그룹 총수다. 때마다 정보와 단절된 상태로 10년 가까이 보내고 있다.

삼성은 쇠퇴하고 있다. HBM 사업을 놓친 것을 비롯해 여러 오점은 이 회장의 사법적 굴레가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남긴 이른바 ‘전설의 테이프’를 들은 적이 있다. 상대는 당시 이수빈 비서실장. 선친인 이병철 창업주의 최측근이다.

“가슴이 터져. 이건 죄악이야. 물건 한 개라도 이런 식으로 (불량) 나오면 안 돼.”

그 뒤의 대목이 놀랍다.

“소학교 6학년부터 나만큼 전자제품 써본 사람이 삼성그룹에 어딨어. 나만큼 일본 기술자 경영자 판매자 얘기 들어본 사람이 삼성에 어디 있냐고. 내놔보라고, 누가 있어? 왜 내 말을 안 듣냐 말이야.”

실제 이건희 회장은 당시 일본의 최고급 정보와 기술을 매일 접했다. 그래서 확신이 있었을 테다. 삼성은 이 녹음을 사장단에게 들려줬다.

불량품을 만들던 삼성은 질적인 성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경영은 토론을 통한 게 아니다. 최첨단 정보와 기술을 접했던 한 사람의 결단이었다.

이재용 회장도 환경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지난해 5월에는 일론 머스크, 젠슨 황을 그 몇 달 전에는 빌 게이츠, 올 초에는 샘 알트만을 만났다. 글로벌 첨단 정보를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접하는 사람이다. 미국 대통령이나 빈 살만 등 유력자들과 만나 정세와 동향을 꿰고 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초 삼성전자 부장으로 입사해 기술과 제품을 챙긴 지 30년이다. 부친처럼 “내 말을 들어”라고 새로운 길로 리드할 만하다. 이런 그를 한국은 10년간 감옥과 재판정에 묶어놨다.

질문해본다. ‘이건희 회장 없이도 전문경영인들이 삼성을 잘 키웠을까’.

아니라고 본다. 대통령이 바뀌면 우회전하던 나라가 좌회전으로 바뀌듯, 기업도 총수 한 명에 운명이 바뀐다.

앞으로도 이 회장은 재판정에서 묵언수행해야 한다. 삼성 주가 하락을 바라나. 누굴 탓해야 하나.

[주간국장 kim.seonkeol@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3호 (2024.11.06~2024.11.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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