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팬클럽의 시초?…안방 사로잡은 '정년이' 인기 비결

강혜란 2024. 11. 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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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 최고의 국극배우가 되기 위한 '타고난 소리' 정년이의 경쟁과 연대 등 성장 서사를 그린다. 사진 tvN


“소리, 춤, 연기, 모두 빠질 것 없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는다.”(원작 웹툰 ‘정년이’의 여성국극 소개말)

1950년대 6·25 전쟁 직후 궁핍한 시대에 피어났던 여성 소리꾼들 이야기가 안방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2일 방영된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12부작) 7화는 수도권 가구 시청률 평균 10.3%를 보이며 지상파 포함 전 채널에서 동시간대 1위를 고수했다(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 이날은 주인공 윤정년(김태리)이 극중극 ‘자명고’의 구슬아기 대역을 비범하게 소화하면서 매란국극단의 정식 연구생이 되는 과정을 담았다.

첫 화(10월 12일) 5.7% 시청률로 시작한 ‘정년이’는 6화 13.7%를 찍는 등 일요일 방영분이 강세를 보이면서 안정적 우상향 곡선을 보인다. 지난 1일 ‘K컬처 트렌드 포럼’ 발표에서 타이틀롤 김태리가 드라마MVP에 뽑히고 동명의 원작 웹툰도 웹툰MVP에 선정되는 등 화제몰이도 계속하고 있다.

'정년이'에서 당대 최고의 남장 주인공 문옥경은 정은채가, 여자 주인공 서혜랑은 김윤혜가 연기한다. 사진 tvN


배우들 수년간 소리 연마, 실제처럼 공연


‘정년이’는 타고난 천재 소리꾼이 당대 최고의 인기 장르였던 여성국극의 스타로 거듭 나는 과정을 그린 성장 서사물. 2019년부터 3년 간 총 138화에 걸쳐 연재된 원작 웹툰(글 서이레, 그림 나몬)이 이제는 잊힌 여성국극을 기억의 수면 위로 띄워 올렸다면 드라마는 이를 영상화함으로써 사실감을 더했다.

첫 화부터 ‘자명고’의 호동왕자 역 문옥경(정은채)과 목련공주 역 서혜랑(김윤혜)의 맛보기 공연 장면으로 시선을 잡아끌었고 ‘춘향전’과 ‘자명고’ 등 극중극을 마치 공연장에서 중계하듯 구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김태리 뿐 아니라 주요 배우들이 수년간 소리를 연마했고 후반작업으로 보완해 극중 소리의 완성도를 높였다. 극중극도 실제 같은 리허설을 거쳐 무대 촬영에만 일주일을 쏟았다.

3일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김선태 책임프로듀서는 “50·60년대 관객들이 국극 무대를 통해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듯 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게 국극 연출가(박민희)와 전문 스태프를 별도로 꾸려 촬영했다”고 소개했다. 정지인 연출은 “왕자·공주·악당·광대까지 모든 캐릭터를 여성 배우들이 소화하는 과정은 생각 이상의 희열이 있었다”면서 “이런 에너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 움직임과 후반작업에 힘썼다”고 전했다.

1950년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 최고의 국극배우가 되기 위한 '타고난 소리' 정년이의 경쟁과 연대 등 성장 서사를 그린다. 사진 tvN
'정년이' 속 매란국극단 연구생의 모습은 K팝 아이돌그룹 연습생의 훈련과정을 연상시킨다. 사진 tvN


'팬클럽' 시초가 여성국극…과거를 재발견


“과거는 낯선 나라”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되살린 우리 소리와 춤, 이야기는 젊은 세대에겐 새로운 발견을, 나이든 세대에겐 기억의 미화를 선사한다. 특히 국극의 인기를 요즘 대중문화에 빗대 연출한 점이 두드러진다. 매란국극단 연구생들의 선발·수련이 K팝 아이돌그룹의 연습생 훈련과 다르지 않고 숙소 앞에 진을 치는 팬덤 묘사도 비슷하다.

정 연출은 “국극 자문을 한 정은영 작가(영화 ‘정동의 막’ 연출)로부터 우리나라 팬클럽 시초가 여성국극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당시 기사 자료 등에서 확인되는 팬들의 열정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걸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극중극을 위한 ‘오디숀’(당시 표기)을 빌어 배우들의 연기 대결이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처럼 전개되는 것도 흥미를 돋운다. ‘자명고’의 ‘가다끼’(남역 조연으로 주로 악역을 뜻하는 국극 은어)인 고미걸 역을 두고 허영서(신예은)가 음험한 캐릭터를 구사할 때 정년이가 뇌쇄적인 악당 연기로 차별화하는 식이다.

정 연출은 “오디션 장면이 당위성을 가져야 그만큼 매란의 벽이 높게 느껴질 수 있어 전진 배치했다”면서 “극중 인물들의 도전이 그걸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도 이중의 도전이었다”고 돌아봤다. 이 과정에서 마치 ‘흑백요리사’ ‘뭉쳐야 찬다’ 같은 리얼 예능에서 직업인의 전문성을 엿볼 수 있던 것처럼, 배우들의 연기 테크닉이 실감나게 중계된다.

'정년이'의 타이틀롤 김태리는 물론, 그의 라이벌 허영서 역의 신예은 등 주요 배우들은 수년간 소리를 따로 배워 실제 공연처럼 연기했다. 사진 tvN


신입 직장인의 성장 서사…여성주의 부각


극단 신입 정년이가 리허설이나 실제무대에서 겪는 좌충우돌은 ‘미생’(2014) 속 서툰 직장인의 사회 입문 과정과 조직 vs 개인 갈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정년이의 라이벌 영서가 마치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르처럼 비치는 것도 대중의 공감을 사는 지점이다. 영서가 “너희 엄마나 너 같은 천재들은 연습을 안 하고도 알 수 있는데,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하니까 우스워?”(7화)라고 할 때 정년이는 “니가 지금껏 피땀흘려 쌓아온 모든 것은 다 오롯이 네 것이여”라고 답함으로써, 갈등하기보다 연대하는 여성들의 ‘워먼스’(남성들의 브로맨스의 여성 버전)에 주력한다.

드라마·영화를 막론하고 대세배우로 활약 중인 김태리의 팔색조 연기는 물론, ‘국극황태자’로 불리는 문옥경 역 정은채가 중성적 매력을 발산하고 영서 역의 신예은 등이 고른 활약을 펼친다. 다만 원작에서 국극단 안에서 전개되는 동성애 코드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과 달리 드라마는 핵심 퀴어(성소수자) 인물을 생략하면서 일각의 비판을 샀다.

제작진은 이에 대해 “여성의 연대와 성장이라는 중심 줄거리에 주력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7화에서 정년이 친구 홍주란(우다비)이 남장 배우들에게 은밀하게 흔들리는 감정이 포착되면서 향후 전개에 관심이 모인다.

'정년이' 속 여성국극 인기극 '자명고' 공연 장면. 사진 tvN

드라마를 ‘숏폼’으로 편집한 동영상이 유튜브 등을 통해 인기를 얻고 이것이 다시 시청률 상승으로 돌아오는 최근 트렌드가 ‘정년이’에도 강하게 반영된다. 제작진이 극중 오디션과 국극 공연장면을 별도로 편집한 영상은 2주만에 누적 조회수 1000만 뷰를 돌파했고, 이를 포함한 드라마 관련 영상은 3주차에 총 1억뷰를 넘었다.

tvN 측은 “남자 40대 시청률이 여자 20대보다 높게 나타나는데, 일반적인 로맨스물이 아니라 소리꾼의 성장서사라는 점에서 연령·성별 고르게 호응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세계 시청자들과도 만나면서 글로벌 콘텐트 평점 사이트 IMDb에선 에피소드 최고 평점 9.7(3화)을 기록하기도 했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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