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샤워하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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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연 기자]
춘천에 로망이 있다. 누군가 어느 도시에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아묻따(아묻고따지지도않고) 춘천이다.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 등 호수가 반이고 대룡산, 삼악산, 마적산 등 산이 반인 도시.
이른 아침, 물안개가 산을 배경으로 신비로운 붓질을 시작하면 사계절 다른 풍경화가 탄생하고 소양강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정신까지 혼미해져서 이럴 때 '도를 아십니까'를 만나면 낚일 위험이 매우 크다.
서울에서 청춘 열차를 타면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지만, 도시 풍경은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다르게 느껴지는 곳. 나의 춘천에 대한 로망은 오래전 이외수 작가님의 '말더듬이의 겨울 수첩'을 읽고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난 남도의 끝자락에 사는 소녀였고, 그런 내게 춘천은 미국만큼이나 멀었다.
당시 나는 그를 무척 흠모했는데, 당시 그는 몇 년 동안 씻지도 않고 이도 닦지 않았으며 머리는 길게 자라 산발이고 밥은 밥 먹듯이 굶어 삐쩍 마른 몸에 살기 위한 열량은 알코올로 섭취하고 매일 새벽이면 외로움에 지쳐 안개 낀 공지천을 유령처럼 떠돈다고 했다.
그때 그의 이런 기행이 내겐 예술가의 낭만으로 느껴졌다. 평소 난 우리나라가 물부족 국가임을 외치면서 잘 씻지 않는 편인데, 나의 이런 낭만(?)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지 싶다.
성인이 되고 처음 간 공지천은 내 상상과는 달랐다. 이외수 작가님이 책을 쓰신 때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도 있지만, 내 맘대로 미화한 면도 있었다.
지금 공지천엔 잘 가꿔진 공원과 체육시설이 있고, 봄이면 벚꽃이 장관을 이루는 산책로도 있다. 지난달엔 춘천 마라톤(10월 27일)이 열렸는데 그 시작 점도 공지천이다. 또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에티오피아 칵뉴 부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한국전 참전기념관'도 있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일면식도 없는 극동 아시아까지 날아와 목숨을 바쳐 싸워준 에티오피아 용사들을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용사라지만, 겨우 스무 살 언저리였을 청춘들…. (미안하고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 옆으로 우리나라 최초 로스팅 카페인 '이티오피아 벳'(집)이 있다. 1968년, 에티오피아 황제는 기념관 건립을 위해 춘천을 방문했고, 이때 두 나라의 교류를 위해 문화원이 생겼는데, 그때 생긴 문화원이 지금의 이 카페가 되었다. 원두커피조차 생소했던 시절, 황제가 하사한 황실 생두를 프라이팬과 방앗간에서 볶아가며 커피를 내렸다고 한다.
최근 몇 년, 난 방구석에서 자판만 두드리다가 글이 막히는 날엔 지하철을 타고 용산으로 가 청춘 열차를 탔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춘천 가는 길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춘천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더 새로운 장소를 찾아 헤맸고, 그렇게 발견한 곳이 이상원 미술관이다.
▲ 이상원 미술관 전경 |
ⓒ 문하연 |
미술관은 춘천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길을 잘못 들었나 의심하던 차에 미술관이 나타났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보긴 했는데, 실물은 그 이상이었다. 미술관 옆으로 계곡이 흐르고, 물소리 새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속에 동그랗게 생긴 미술관이라니.
▲ 이상원 미술관 야경 |
ⓒ 문하연 |
배꼽시계가 울리자, 레스토랑으로 이동해 '이븐'하게 구워진 소시지와 간이 좋은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은 4층부터 전시를 시작해서 2층까지 이어지고 1층은 아트숍과 카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가 문이 열리자마자 전시실 벽에 쓰여 있는 문구가 보였다.
"버려진 것들을 보았을 때, 마치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작품을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마침 드라마 공모전을 준비했다가 떨어지면서 '버려진 것들 =내 작품=나 자신'이란 좌절감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저 문구를 본 것이다. 이 전시는 나를 위한 거겠구나,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 해변의 풍경 |
ⓒ 이상원 미술관 |
▲ 해변 |
ⓒ 이상원 미술관 |
▲ 시간과 공간, 중앙미술대전 특선 작품 |
ⓒ 이상원 미술관 |
▲ 안중근 의사 영정 초상화 |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당시 안중근 의사 건립 위원회가 유력 화가들에게 의뢰했으나, 공인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겉모습을 닮게 그리기보단 안 의사의 기개가 표현되도록 해달라'는 이은상 선생의 요청에 따라 정성스럽게 그려졌고, 1970년에 개관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봉안되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림을 실제 보니 아우라가 엄청났다. 단정한 검은 슈트를 배경으로 손가락이 잘린 손은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공손하나 당당하다. 말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졌다.
▲ 마대의 얼굴 |
ⓒ 이상원 미술관 |
"한때는 쓸모가 있었던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건이지만, 마치 사람 같기도 한…. 그래서 더 연민이 느껴지는.
▲ 시간과 공간 |
ⓒ 이상원 미술관 |
제목이 '시간과 공간'임을 참작하면 그 시간과 공간에 남겨진 흔적이라고 보이긴 한데, 작가는 대체 왜 저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한 마음에 그의 인터뷰를 찾아보던 중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 동해인 |
ⓒ 이상원 미술관 |
▲ 영원의 초상 |
ⓒ 이상원 미술관 |
▲ 이상원 미술관 1층 카페 |
ⓒ 문하연 |
▲ 금속 공방에서 만든 책갈피 |
ⓒ 문하연 |
금속 공예 체험은 책갈피 모양을 고른 다음 그 안을 꾸미는 건데, 난 간결하게 영문 이니셜 두 개만 팠다. 이 단순한 걸 노안 때문에 방향이 삐뚤다. 이니셜 아래 꽃 모양은 보다 못한 친구가 넣은 건데, 내 보기엔 도긴개긴이다. 빵 성지 투어, 맛집 투어, 카페 투어 등, 요즘엔 여행 주제도 많다. 만일 이 모든 게 내키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예술로 샤워하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사용한 작품 사진은 이상원 미술관으로부터 사용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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