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 오후 4시, 봉강정해룡평전출판기념회 준비위원회는 서울시 종로구의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봉강 정해룡 평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권영길·박준영·이부영·이상수 전 국회의원,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 함세웅 신부, 한홍구 교수,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 임진택 명창과 시민사회 각계 인사 400여 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 이부영 이부영 봉강 정해룡 평전 출판기념회 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발언하는 모습이다.
ⓒ 강승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두엽 부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출판기념회에서 이부영 준비위원장(봉강정해룡평전출판기념회 준비위원회)은 역사 기행을 하다 봉강 정해룡의 무너져가는 거대한 자택을 보고 충격 속에 당시 박준영 전남도지사를 찾아가 이런 사실을 알리자, 박준영 도지사가 현장을 방문한 뒤, 전남 문화재로 지정하고 재정 지원을 해서 봉강 정해룡의 저택을 복원한 미담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청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봉강의 일생을 함께 공부하고 보면서 이른바 잘 사는 사람들도 어려운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처음서부터 끝까지 자기 것을 모두 내놓으면서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두 적대감을 가지고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너무 쪼그라들게 만드는 것 아니냐. 봉강을 볼 때마다, 제가 몽양기념사업회 회장을 하면서, 몽양 선생 기록에 나오는 봉강의 모습, 정해룡의 모습, 참 어쩌면 저럴 수가 있는가 싶었다"면서 "오늘 이렇게 그 어른의 생각과 실천을 묶어서 귀한 책으로 내놨다"고 설명했다.
이어 "저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이전과 이후는 우리 국민의 문화사적, 역사적 기준이 바뀌는 거라고 본다"며 "이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읽히는 것만큼, 그건 아마 젊은 세대들이라고 볼 텐데, 그분들이 꼭 필독서로 읽어야 할 책이 '봉강 정해룡'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며 "한강 작가의 책을 읽은 다음 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함세웅 신부 '정해룡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함세웅 신부가 축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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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위원이기도 한 함세웅 신부는 준비해 온 기도문에서 "2024년 올해 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50주년을 맞이해 봉강 정해룡 평전과 함께 새로 태어나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은총의 체험입니다. 문영심 작가, 한홍구 교수, 평전 출판 준비위원회 그 외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기원했다.
이어 "봉강 정해룡 선생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자신은 물론 형제자매, 자녀 모두가 성실히 지킨 모범적 가정임을 확신했습니다"라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봉강 정해룡 의인과 형제자매 모두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 김민환 교수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 작가가 정해룡 선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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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 정해룡을 다룬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의 작가 김민환 고대 미래학부 명예교수는 소설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서 "민주화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목숨을 버리기도 했고 헌신했다. 특히 이 정권이 들어서서 민주화라는 것은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라며 "바로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사실을 한번 다시 한번 되새기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문영심 작가 '정해룡 평전'의 작가 문영심 선생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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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룡 평전>의 작가인 문영심 작가는 11년 전 <김재규 평전>을 쓰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고 했다. 그러며 "이렇게 클래식한 출판기념회는 11년 만이다. 저는 김민환 교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라고 생각한다"며 "분단 체제를 극복하지 않고,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일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신 우리 봉강 정해룡 선생님 평전을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 한홍구 교수 '정해룡 평전'에 해제를 쓴 한홍구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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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에 해제를 쓴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오늘 이 책에 나오게 되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이 뭐냐 하면 그래도 정해룡 선생님은 이런 효자들을 두셨기 때문에 이렇게 책이 나와서 이 얘기가 널리 알려지게 됐지만 이 책에 나오지 못하는 같은 정씨 일가 사람들만 해도 8분이 돌아가시고 30 몇 명이 감옥에 갔다"면서 "전해지지 못한 이름들이 많다. 그분들을 우리가 같이 기억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정해룡 선생의 셋째 아들이자 사실상의 제일 큰아들 역할을 하셨던 정춘상 선생이 보성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셨다. 이렇게 이 책에 그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같이 기억하고 아파하면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한다"고 추천했다.
▲ 정해룡의 6남 정해룡의 6남인 정길상 선생이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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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 정해룡의 막내 아들인 정길상 선생은 아버지 봉강 정해룡의 비석이 세워지게 된 어렵고도 힘든 과정을 기억하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정해룡의 비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도 세우지 못하고 처마 밑에 숨겨두었던 것을 6.29선언과 광주 5.18 이후, 사찰하던 정보과 형사의 양심 고백과 적극적인 도움으로 25년 만에 빛을 본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정종희의 딸 정숙항 정종희 선생의 딸 정숙항 씨가 정해룡 선생의 연보를 낭독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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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 정해룡은 1913년 7월 2일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정종익과 윤초평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의 종사관이었던 반곡 정경달을 배출한 영성 정씨 사평공파의 장손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3000석 규모의 대지주 집안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춘궁기와 흉년이면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베푸는 가풍을 보며 자랐다. 동생 정해진은 경성제대와 동경제대에서 공부했으나 그는 '장손을 일제에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뜻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그러나 가정교사를 두어 신학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대지주의 집안이면서도 양조장, 인쇄소 등을 운영해 막대한 부를 모았으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점차 재산을 소진했다. 한편으론 민족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35년 인촌 김성수를 통해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에 발전기금을 기부했다. 그 후 고향 보성에 '양정원'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교재, 학용품을 무상 제공했다.
해방 뒤에는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지역위원장이었으며,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중앙위원 겸 재정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여운형은 남북분단을 막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한의 우익 세력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정해룡은 이를 따랐다. 이때 정해룡은 독립과 통일에 좌우가 없다는 신념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방 이후 좌우 대립과 국토 분단은 정해룡 일가의 몰락을 초래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인민공화국에 협조했던 일가친척들이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사살되기도 했다.
1980년 11월 정씨 일가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중 월북했던 아우 정해진이 1965년 8월 봉강리에 몰래 찾아온 그것이 발단됐다. 정해진은 정해룡의 셋째 아들 정춘상과 북으로 갔는데, 정춘상은 보름 후에 김일성 친서와 소련제 기관단총, 난수표, 공작금을 들고 귀향한다. 1967년 이들을 통한 공작사업이 성과를 보이지 않자, 정해진이 한 번 더 봉강리에 찾아오기도 했으나 2년 뒤인 1969년 10월 31일 정해룡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으로 정해룡의 일가 수십명이 체포되고 1985년 월북했던 정춘상은 사형이 집행됐다. 정해룡의 숙부 정종희는 무기징역, 6남 정길상은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 출판기념회의 외빈 정해룡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외빈들의 모습으로 좌로부터 한홍구 교수,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 권영길 전 의원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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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룡 평전' 출판기념회 '정해룡 평전' 출판기념회가 열린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전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