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에 의해, 광복군 대대장이 당한 수모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일본이 한국 지배에 사용한 무력기구 중에서 주한일본군은 해방 뒤에 철수했지만, 일제 경찰은 그렇지 않았다. 경찰 조직에는 한국인이 많았고, 이들은 해방 뒤에도 임지에 남았다. 경찰은 잔존했지만 군대는 그렇지 않은 이 상황에서 미군정은 한국군 조직을 서둘렀다. 과거 전력을 문제 삼지 않고 남조선국방경비대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것이 미군정의 입장이었다.
2009년에 <사림> 제33호에 게재된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국방경비대·육군의 세력 분포와 숙군'은 1946년 2월 29일자 <농민주보>를 인용해 "미군정은 창설 당시 국방경비대원을 모집할 때 '군정장관의 방침에 따라 모든 계급의 인물을 모집'하며 '국방경비대 내에서는 정치문제에 관계하는 것은 금하게 될 것'이고 이와 같은 운동에 관계하는 자는 제대시키겠다고 광고했다"고 설명한다. 입대 이후의 정치활동을 금하면서도 입대 이전의 행적은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나 항일 성향을 가졌거나 남북분단을 반대하는 청년들이 한국군에 들어갔다. 1948년 10월 19일 오전 7시에 이승만 정권이 '제주도를 진압하라'고 명령하자 여수 제14연대 장병 2천 명이 즉각적으로 '싫다'라고 응답한 사실은 이 시기 한국군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1947년 하반기부터 숙군 작업이 진행됐는데도 이런 현상이 나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청년들을 좌익 빨갱이로 규정하는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숙청 작업은 미군정 때 시작돼 이승만 정권 때까지 진행됐다. 두 시기의 숙군 작업에 이리저리 다 걸린 인물이 있다.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한국광복군에서 대대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오동기가 그런 얄궂은 운명의 피해자가 됐다.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
ⓒ 위키미디어 공용 |
2013년에 <전북사학> 제43호에 실린 역사학자 주철희의 논문 '여순사건 주도 인물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호적 이름이 오중환(重煥)인 그는 1901년에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했다. 중국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고, 1947년에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 특임반을 거쳐 대위로 임관했다.
그 뒤 그는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감찰감 등을 거쳐 1948년 7월 15일 제14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이 부대가 10월 19일에 이승만에게 맞선 일로 인해 잠시동안 그는 여순항쟁(여순사건)의 주역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오동기는 감찰감 재직 당시 좌파 숙청에도 가담했다. 위의 <사림> 논문은 일본군 대위 출신의 국방경비대 대위이자 좌파 활동가인 김종석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 1 – 해방과 건군>을 근거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국방경비대 제2연대장으로 있을 때 연대 자금을 남로당에 제공했고, 이것을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감찰감 오동기가 적발해 이상진(만주군 출신)과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처럼 좌파 숙청에 참여했던 오동기도 결국에는 좌파 숙청의 올무에 걸려든다. 미군정의 좌파 숙청 레이더에 걸려들었다가 얼마 뒤 출범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구속됐다. 두 정권의 숙청 작업에 다 걸려든 것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이 임시정부와 협의해 미·소·영·중 4개국 신탁통치를 최장 5년간 실시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이를 이행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과 1947년에 열렸지만 의견 차이로 결렬됐다.
이것은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북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명분이 된 동시에 또 다른 것의 계기가 됐다. 이는 미군정이 친일청산을 찬동하거나 남북분단을 반대하는 세력을 좌파로 몰아 군에서 숙청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공동위원회가 결렬돼 남북을 아우르는 임시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미군정은 숙군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분단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이렇게 본격화된 숙군 작업이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정권에 인계된 직후에 발생한 현대판 역모사건이 오동기와 최능진(전 미군정 수사국장) 등이 관련된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최능진은 소련군이 싫어서 월남한 우파 독립운동가다. 1948년 5·10 총선 때 무투표 당선을 추진하는 이승만에게 타격을 줄 목적으로 서울 동대문갑구에 입후보하려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좌파가 아닌 인물들이 좌파 집중단속 기간에 걸려든 것이다. 이들이 분단에 찬동했다면 쉽사리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1948년 10월 5일자 <조선일보> '정부 파괴 혐의'는 최능진·서세충·김진섭이 그달 1일 수도경찰청에 체포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체포 이유는 작년 11월경부터 국군 소령 오동기 등과 공모하여 국방군 속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현 정부를 붕궤시키려 한 것"이라고 전했다.
당사자들은 혐의를 부인했다. 1949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혁명군 사건'은 당사자들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면서 "김진섭은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서세충은 민족혁명이라는 말조차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이라고 전적으로 부인"했다고 전했다. 그런 뒤 "다만 최능진만은 민족혁명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논한 다음, 무장봉기만은 생각하지 않었다고 부정"했노라고 전했다. 민족혁명은 필요하다고 생각지만 무장봉기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 진술이 그나마 유죄 인정에 가장 가까웠다.
그러나 미군정과 친일파들에게 맞서는 세력이 오동기에게 접근할 움직임을 보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위 노영기 박사논문은 정용욱의 <해방 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제10권을 근거로 "미군방첩대는 1948년 4월경에 이미 혁명의용군사건이 발생할 것을 예상했다"라며 "혁명의용군 사건이 발발할 무렵 그들의 목표가 국방경비대에 침투하는 것이며 주요 대상은 오동기를 통해 침투하려는 것이며 한국방첩대가 조사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미군방첩대가 주시하고 있었던 움직임이 정부수립 직후에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체화됐던 것이다.
▲ 1946년 2월 6일 자 <동아일보> 2면 우상단. 광복군 일부가 입국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오동기가 귀국단장이라고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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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기는 1948년 9월 28일 소환되고 10월 1일 구속심문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오동기를 10월 19일 발발한 여순항쟁과도 엮으려 했다. 10월 21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범석 국방부장관은 전 14연대장인 오동기가 주역이라고 발표했다.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속된 오동기를 이 사건과도 엮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발표는 얼마 안 있어 흐지부지됐다.
오동기는 군법회의에서 징역을 선고받은 1949년에 파면됐다. 그런 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오동기보다 한 달여 뒤인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 박정희는 육군 정보국장 백선엽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번 살려주십시오"라고 읍소해야 했을 정도로 남로당과의 연루 사실이 확실했다.
오동기는 좌파와 연루되기는커녕 좌파 숙청에 참여했는데도 박정희와 달리 형무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의 한국군 수뇌부가 친일파들에게 장악된 것이 이런 차이를 낳았다. 광복군 출신 오동기를 변호해줄 세력이 수뇌부에 없었던 것이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오동기는 석방됐다. 북한군이 협조를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뒤에 자수해 징역 5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북을 거부하고 남을 선택한 이런 인물이 좌파 숙청 감시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76세 되던 1977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광복군 대대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군에 들어간 오동기는 미군정의 숙군 감시망에 걸려들었다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숙청됐다. 이 정권은 그를 여순항쟁과도 엮으려 했다. 그가 광복군 출신이 아니었다면, 분단을 찬동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들이다. 그렇게 파면된 그의 독립운동은 지금까지도 무시되고 있다. 광복군 대대장이었던 그를 국가보훈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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