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지적 성장을 위해 ‘차분한 충돌’ 필요
“오늘 도널드 트럼프의 연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방송사 기자가 보스턴 대학가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 대체로 반(反) 트럼프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학생들은 나름의 이유를 들어 그의 정책은 물론 말투나 외모에도 냉소를 보낸다. 하지만 막상 연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학생은 많지 않다. 기자의 질문이 이어지지만 대충 무시하고 넘어간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오늘 트럼프의 연설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지난 2016년 미국 대선 캠페인이 한창이던 당시 보수 언론사인 폭스 뉴스사에서 기획한 일면 영리하면서도 악의가 섞인 이벤트다. 그럼에도 한 가지 자명한 것은 나름 지성인으로 인정받는 그들의 인색한 평가가 오로지 트럼프에 대한 기존 태도에 기반했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연설은 보나 마나다. 어차피 친자본주의와 대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불법 이민자에 대한 강경대응 등 진보적이고 친인류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학생들이 혐오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을 터. 오히려 트럼프의 연설은 그의 지지자들이 자신의 친(親) 트럼프적인 태도와 세계관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미디어는 새로운 정보의 학습이 아니라 나의 신념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선택적 노출(selective exposure)’은 미디어 학자들 사이에서 문제로 적시되고 있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없다. 대상에 대한 태도가 이미 강하게 자리 잡은 경우 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특히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정치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나와 반대되는 태도를 가진 이들의 말은 듣기도 싫다.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열심히 떠들어 봤댔자 돌아오는 것은 냉소와 조롱. 다음에 만난 그들의 태도는 나의 그것과 더 멀어져 있고, 대개 새로운 논리나 근거로 재무장하여 나를 더 강하게 공격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너무도 흔해진 말. 불통(不通). 원래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혹은 ‘말이 안 통함’ 정도를 뜻하지만 실은 설득 실패의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는 발화 행동(speech act)이다.
곧 대선을 맞는 미국에서는 벌써 지난여름부터 사내에서 직원들 사이에 정치적 대화를 금지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었다. 힐튼을 비롯한 여러 대기업에서 두 대선 후보를 두고 직원들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에 문제가 생기면서 대응책으로 만든 규칙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라도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를 간섭할 수는 없다. 한국 기업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민감할 수 있는 정치 이야기는 직장인들 스스로가 자제하고 있는 눈치다. 표현의 자유보다 타인과의 관계나 팀의 하모니를 더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성향이 잘 반영된 문화현상이라 하겠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트렌드가 딱히 문제 되지는 않는다. 각자가 자신이 가진 데이터와 관점에 따라 표를 던지고 나면, 극한 의견들은 서로 상쇄되고 ‘국민의 뜻’ 그 근처 어딘가에 투표의 결괏값이 떨어지게 되어있다. 최소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이를 위해 충족되어야 할 필수조건이 두 가지 있다.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지성(知性) 혹은 인텔리젼스(intelligence)다.
인텔리(Chat-GPT4o)는 인텔리젼스를 어떻게 정의할까.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고 처리하는 능력, 문제해결 능력, 논리적인 생각과 판단 등 식상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필자가 기대하던 답을 준다. 적응력. ‘새로운 경험을 기존의 지식에 통합하거나 조정하는 능력’이란다. 흥미롭게도 이는 인공지능(AI)에 최적화된 작업이다. 데이터에 모델을 맞추는 것. 인간의 언어를 빌리자면 팩트에 프레임을 맞추는 것이다. 수만 번의 모의고사를 거쳐 조(兆) 단위의 문서에서 추출한 단어 간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재현할 수 있는 모델을 완성해 간다. 최초의 모델은 거의 갓난아기 수준. 오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기계는 데이터를 다시 확인하고 모델을 조금씩 수정해 예측을 거듭한다. 기계에게는 이 지루한 과정이 바로 ‘학습’이고, 이것이 수십 만 번 반복되고 나면 기계는 상징체계로 구현된 인간 세상사를 제법 잘 이해하게 된다. 특히, 설계자가 달리 의도하지 않는다면, 기계는 학습 과정에서 데이터를 편식하지 않는다. 기계의 세계관이 우리의 그것에 비해 왜곡이 적은 이유다.
팩트와 프레임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기꺼이 팩트를 버린다. 팩트에 따라 프레임을 업데이트하는 노력, 다시 말해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나의 프레임에 반대되는 사실이나 의견은 왠지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져 불편하다. 토론의 달인들도 자신이 옹호하는 사상이나 인물에 대한 반박을 여유 있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곧 허연 이빨을 드러낸다.
사실 프레임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뉴턴의 물리 이론이 너무도 정확하게 천체의 움직임을 예측했기에, 천왕성이 예상 궤도를 벗어났음에도 그들은 기존의 물리법칙을 버리지 못했다. ‘천왕성 밖에 행성이 하나 더 있다면’ 지금의 이론으로도 천왕성의 기행이 설명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탐사를 시작했고 인류는 곧 해왕성을 찾아냈다. 프레임에 대한 신념이 과학사적 발견으로 이어진 사례다. 그러나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현상을 잘 설명하는 이론, 혹은 팩트와 일치하는 프레임을 지향한다. 그들은 분자 단위의 소우주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과감히 뉴턴의 법칙을 버리고 양자물리학을 채택했다. 이렇듯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주로 이론과 현상, 프레임과 팩트가 충돌할 때다. 그 둘을 화해시키려는 노력만 있다면.
지성, 즉 새로운 팩트에 따라 프레임을 수정해 나가는 능력이 단지 AI와 과학자들의 전유물이겠는가. 우리도 배울 만큼 배운 지성인 아닌가. 독자도 별 뜻 없이 했던 말이나 행동에 스스로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프레임과 팩트가 충돌했기 때문일 확률이 높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충돌의 횟수와 강도가 높을수록 돈오(頓悟)의 경험은 더 깊고 잦아진다.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정치 이슈에 대한 대화를 억누름으로써 공동체의 화목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만큼 우리는 지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충돌의 경험’을 잃고 사는 셈이다. 마치 얼어붙은 강물처럼 표면은 고요하지만 그 밑에선 아우성이 끊이지 않는다. 정치 담론은 이제 우리의 휴대전화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세계관에 맞는 프레임과 팩트만 골라 먹을 수 있다. 말하자면 정보의 편식. 애석하게도 거기에 충돌과 성장은 없다.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저자로 유명한 인류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2006년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새로 발간하며 과학과 종교계로부터 폭발적인 관심과 비난을 받는다. ‘인류의 도덕률은 우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종교 때문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자연발생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동학대와 같다’ 등 그의 책은 논란이 될 수 있는 명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가득하다. 마냥 자애롭기만 할 것 같던 종교인들로부터 그는 수백 통의 협박 편지를 받았고, 도킨스는 그 편지글들을 공개해 종교계를 비판하는데 역이용한다.
결국 BBC가 나서 ‘성경은 여전히 유효한가?(Is the Bible still relevant?)’라는, 일면 코미디처럼 가벼우면서도 다른 한편 너무 무거워 쉬이 말을 꺼내기 어려운 주제로 공개토론을 주선한다. 패널이 가관이다. 도킨스를 포함한 과학자와 인류학자는 물론 주교와 신부 등 가톨릭 종교계 인사, 유대교 지도자, 성경학자, 무신론자가 총집합했고, 방청객 중에서도 종교와 과학계에 몸담은 이들이 많았다. 때로 주제를 벗어나 서로를 향한 인신공격이나 야유로 이어지기도 하고, 다들 한 마디씩은 해야 하는 터라 토론장은 산만하기 그지없다. 물론 명백한 결론이 나온 것도 아니고 상대 진영의 논리에 조금이라도 설득된 패널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저 무의미한 이벤트가 아니다. 거기에는 의미 있는 지적 충돌이 있었기에. 운이 좋다면 상대가 뱉은 말의 씨앗이 기어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 자신의 내부를 흔드는 경험을 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설득은 공개된 자리가 아니라 내재된 프레임과 외부의 자극이 충돌하면서 생긴 균열을 스스로 보수하는 과정에서 시차를 두고 서서히 일어난다. 차분한 충돌. 한국의 지적 성숙을 위한 첫 번째 과제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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