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공영성의 종말
“돈만 있으면 만들죠.” 공영방송국 고참급 예능 PD인 그의 목소리는 살짝 맥이 빠져 있었다. 너무 많이 반복한 얘기라 더 하기 지친다는 말투 같기도 했고, 혹은 이런 현실 자체가 지겹다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도 제작비만 충분하면 다 퀄리티 있게 좋은 형식으로 해볼 수 있죠. 사실 그게 어려워요.” 30분 넘게 이어진 그날 통화에서 가장 많이 나온 표현이 아마 ‘돈만 있으면’ ‘제작비가 충분하면’이었을 것이다.
전화한 건 그가 조연출 시절 제작에 참여한 재난예방 프로그램 ‘위기탈출 넘버원’ 취재를 위해서였다. 마침 그는 지난해 이 프로그램의 후신 격인 프로그램을 만든 참이었다. 일반 프로그램의 절반 수준 제작비였지만 그는 공영성과 재미를 함께 살리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 트렌드에 맞추려고 ‘강철부대’ 같은 서바이벌 형식을 도입했고, 실제 재난 상황을 연출하려 정부 부처와 유관 기관에 기를 쓰고 협조를 구했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시청률은 1%를 넘나드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방송을 본다. 아니, 여느 때보다 많이 본다. 출근길부터 퇴근길, 심지어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 ‘방송’이란 예전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흑백요리사’도, ‘나는 솔로’도, 또 화제라는 ‘APT.’ 뮤직비디오도 사람들은 방송 전파가 아닌 OTT나 유튜브 앱으로 본다. 방송국이 방영하는 프로그램이 주목받기 어려운 것도, 방송 전파가 가장 믿음직한 자산이던 방송국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이런 환경에서 방송의 공영성이란 별 의미 없는 지향이 됐다. 공공의 재산인 방송 전파의 막강한 힘이 사라졌기에 이것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쓸지는 예전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시청자 각각이 좋아하는 방송을 보려고 각 플랫폼에 별도 비용을 지불해 구독하는 ‘좋댓구알’의 세상은 공영성보단 시청자에게 어떻게 선택받을지,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관한 고민만이 어울리는 곳이다.
사실 과거에도 공영성이란 지향점보다는 금지선에 더 가까웠다. 무엇을 방송할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무엇을 방송해선 안 되는지에 관한 규칙 내지는 암묵적 합의가 더 강하게, 잦은 빈도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권위주의 사회에선 이 금지선이 정권의 자의적 폭압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명분이란 공공의 재산인 방송이 적어도 세상에 악영향을 미쳐선 안 된다는 합의였다.
그 합의가 무력해진 지금 겉으로 보기에 방송은 방송국 전파의 울타리를 넘어 무한한 영역으로 뻗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재나 방식, 심지어 자본의 제한조차 없는 이 신세계에서 시청자가 열광만 한다면야 만들지 못할 게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건 역설적이게도 시청자다. 이런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방송이란 사람들의 즉흥적이고 발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만 온 신경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송에서 약자를 향한 조롱이나 선정성, 폭력성이 더욱 진해진 건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이탈리아 영화 거장 난니 모레티 감독의 자전적 영화 ‘찬란한 내일로’에서 주인공인 감독은 부족한 영화 제작비를 투자받으려고 넷플릭스 관계자들과 만난다. 백발의 노년 감독이 작품을 한참 열정적으로 설명하지만 관계자들은 “당신의 영화엔 ‘왓더퍽(What the fuck)’이 없다”며 퇴짜를 놓는다. 얼핏 표현에 자유롭고 거칠 게 없어보이는 세상이지만 우리가 보는 건 외려 더 획일적이고 최소한의 고민조차 거세된 영상뿐이라는 걸, 영화는 유머스럽지만 아프게 지적한다.
‘얼마나 많이 보느냐’ ‘얼마나 세게 반응하느냐’가 좋은 방송의 유일한 잣대가 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허허벌판 황무지가 된 공영성에 관한 논의를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방송 전파와 방송국의 힘이 사라졌을 뿐 방송의 영향력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커졌고, 우리의 일상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방송을 만드는 이들에게 국한될 고민은 아니다. 단순히 구독을 끊고 ‘좋아요’를 취소하는 것에서 벗어나 어떤 방송이 사회에 필요하고 또 만들어져야 할지, 그런 방송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역시 시청자인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온갖 플랫폼에서 넘쳐나는 콘텐츠의 홍수는 알맹이 없는 빈곤함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다.
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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