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처럼 또…비핵화 앞에 북한이냐 한반도냐, 묘한 한미 [현장에서]
3년 전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미가 미묘한 의견 차를 보였다. 비핵화란 단어 앞에 북한이 붙냐, 한반도가 붙냐를 두고서다. 눈여겨 볼 건 이번엔 양국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했던 한국은 이제는 '북한 비핵화'라고 말하는데, 미국은 반대가 됐다.
외교부가 31일(현지시간) '제6차 한·미 외교·국방(2+2) 장관 회의' 후 배포한 공동성명을 보면 전날(30일) 한·미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서 빠졌던 비핵화 문구가 되살아났다. “양측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지속적인 공약뿐 아니라 국제비확산체제의 초석인 핵확산금지조약(NPT) 상 의무에 대한 오랜 공약도 재확인했다”는 구절이다.
일단은 “북한의 비핵화라는 공동 목표를 견고히 견지하고 있다. 비핵화는 한·미 외교·국방장관 2+2 회의에서 언급될 것”이라는 국방부의 해명대로였다. 전날 SCM에서 매년 언급된 비핵화가 9년 만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지적 받자 국방부는 “북한 핵능력 고도화에 따른 대응 방안에 집중하고 외교적 목표를 다루는 2+2에서 비핵화를 언급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사실 이번 비핵화 누락 논란은 미국의 요구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에서 비롯됐다. 비핵화보다 핵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보는 워싱턴 조야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이다. “북한과 비핵화를 향한 ‘중간 단계의 조치(interim steps)’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의 발언(지난 3월 ‘중앙일보-CSIS 포럼 2024’)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비핵화에 매달리기보다 ‘중간 단계’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물론 한국 정부는 부정적이다. 중간 단계에서 '스몰 딜'이 이뤄진 뒤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그래서 공동성명의 비핵화 표현을 두고 정부 관계자는 “한·미 고위급 회담에서 양국의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했으니 논란이 일단락된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양국 간 입장 차이를 둘러싼 의구심은 여전하다. 이날 공동기자회견에 나온 미측 인사들은 모두발언에선 비핵화란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미국 측의 언급은 질의응답 중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전날 SCM 공동선언에서 비핵화가 빠졌다’는 질문에 “우리의 정책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적어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삼을 것”이라고 답한 게 전부다.
조 장관과 김 장관이 '북한 비핵화'를 말한 반면 블링컨 장관은 '한반도 비핵화'를 얘기한 점도 한·미의 간극으로 읽을 수 있다. 이후 7시간 후 나온 공동성명에도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가 담겼다.
이를 두고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과거 한·미 회의 결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 비핵화란 말이 더 많다”며 “‘한반도 비핵화=북한 비핵화’이므로 북한이냐, 한반도냐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말 두 용어는 사소한 표현 차이에 그칠까. 사실 과거 용례를 보면 의미 차이가 더욱 드러난다. 비핵화 대상으로 북한을 명시하는 북한 비핵화는 한반도 비핵화보다 북한의 책임을 더 무겁게 담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2+2 회의에선 한·미가 이 두 표현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당시 블링컨 장관은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 비핵화’를 밝혔지만 한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고수했다.
정의용 당시 외교부 장관은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비핵화보다는 한반도 비핵화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가 더 올바른 표현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런 이견이 영향을 미쳐 한·미는 공동성명에 비핵화 용어를 담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사용한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한 비핵화를 공식석상에서 사용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문재인 정부와 한반도 비핵화 표현을 공유하던 바이든 정부도 지난해 8월 한·미·일 정상회의 캠프 데이비드 공동성명, 같은 해 11월 SCM 공동성명 등에서 북한 비핵화를 쓰면서 윤석열 정부와 보조를 맞췄다.
이런 이력을 모를 리 없는 미국이 태도를 바꿨다면 가볍게 볼 사안은 아니다. 일각에선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어로 표출했다는 해석까지 나온다. 외교적 수사의 무게감을 따져보고 입장 차이가 포착됐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뜻을 맞춰가는 것도 방법이다.
워싱턴=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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