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합천, 밀양, 삼평리... '연대'를 배우다
[김우창 기자]
2019년 박사논문 주제를 고민하고 있던 나는 원폭 피해 문제를 잘 이해하기 위해 나가사키에 갔다. 해마다 8월 원폭 투하 추모주간을 맞아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번갈아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 주제가 바뀌면서 이 문제는 내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그때 나가사키에 함께 갔던 전경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 대표에게 올해 8월 다시 연락이 왔다. "나가사키에서 정말 큰 충격을 받았고 연대감을 느꼈어요. 올해 히로시마에 다시 갑니다"라는 메시지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가사키와 피폭자들을 잊고 살던 나는 연구를 위해 그들의 삶과 피해 그리고 현장을 그저 '연구대상'으로만 여겼던 것은 아닌지, 그들을 대상화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웠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모두 방문한 그가 궁금했다.
연거푸 인터뷰 제의를 거절했지만, 그에게 편하게 이야기해달라고 하였다. 10월 18일 2시간 가량 그의 고민과 활동들을 묻고 들었다.
▲ 밀양에서 밀양에서 |
ⓒ 전경림 |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데. 민의련이라는 단체도 저는 잘 몰랐어요. 그동안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나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에서는 꽤 많이 갔는데 건약에서는 주로 상근자 선생님이 다녀왔고요. 건약은 초기 선배들이 반핵 활동을 했었고, 저도 핵의 위험성에 대해 조금씩 고민은 했어요. 근데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들의 소식을 전해 듣거나 후원으로 연대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죠."
전경림은 주도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기보다는 동료들의 활동을 전해 듣거나 후원으로 연대하는 '간극' 속에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던 여행에서 그의 가슴 속에 돌덩어리 하나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가사키에서 피폭자의 증언을 들었을 때,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피폭을 당한 이후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몸, 상처에 있던 구더기를 떼는 것이다'였어요.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 정부가 일본 국민조차 보호하지 못했던 현실이 끔찍했죠. 폭심지에서 숙연한 마음은 있었지만, 한국인 위령비를 보면서 더 가슴이 아팠어요. 한국인 원폭 피해자도 꽤 많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로부터도 배제당하고 한국 정부로부터도 지원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이분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진거죠."
무엇보다 그가 감동하였던 것은 민의련 선생님들의 진정 어린 사과와 연대에 대한 진심이었다. "한국침탈은 일본 정부의 사과가 있었어야 했지만, 사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대신 사과한다, 사과하고 싶다"라고 말했어요. 그분들은 역사의식을 갖고 저희에게 울먹이면서 사과를 하셨는데, 그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민의련 선생님들이 얼마나 한국에 있는 보건·의료인들과의 연대에 진심이었는지, 그 여운이 참 오래갔었어요"라고 회상했다.
▲ 히로시마 원폭돔 히로시마 원폭돔 |
ⓒ 전경림 |
"저희에게 말씀해주신 관장님은 일본에서 피폭당한 1세대로, 폭심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살아 한국 정부로부터는 보상을 받지 못했고, 당시 일본 정부에서 준 피폭 수첩이 있어서 그걸로 약간의 지원을 받아왔대요. 그런데 문제는 약간의 지원마저 1세대만 지원되고 그 후손인 2·3세대에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2·3세대에게 지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피폭당한 피해자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자신만이 아니라 후손들이 더 큰 낙인이나 차별과 배제를 당하는 이중·삼중고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본인이 피폭당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대요. 물론 피폭당해서 눈에 보이는 장애나 육체적인 피해를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식에게 유전될까 봐 걱정할 수밖에 없었죠. 또한 유전으로 발현되지 않았어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순간 후손들의 결혼이나 취업 등에 방해될까 봐, 그들이 자신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까 봐 많은 사람이 결국에는 한국에서 '피해자나 피폭자'라고 말하지 못했대요. 평생 죄책감이나 짐을 가지고 살아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오히려 숨겨야 하는 상황이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했대요. 최소한 피해자임을 드러내야 정부에 지원을 요구할 텐데, 싸울 수도,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거죠."
나가사키, 합천 그리고 청도 삼평리
전경림은 2024년 8월 히로시마에 가기 전인 6월 11일 밀양에 연대하러 갔다. 밀양 행정대집행 10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대구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은 청도 삼평리를 들렀다가 다시 밀양에 모였는데, 그때 전경림은 깜짝 놀랐다. 삼평리에서도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길고 외로운 싸움이 있었는데, 전경림은 그곳을 '대구에서도 먼 지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도 삼평리가 저는 엄청 먼 지역인 줄 알았는데, 헐티재를 넘으니 바로 삼평리였어요. 저는 헐티재 넘어서 자주 간단 말이에요. 도대체 청도 삼평리가 어디에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세상에 우리가 자주 다니던 '드라이브길' 거기가 삼평리더라고요.
저는 오랫동안 싸우는 삼평리 할머니들이 '의지가 굳은 투쟁가'라고만 생각했어요. 어떻게 저런 의지를 지켜올 수 있을까를 생각했죠. 그 할머니는 송전탑 공사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동체 바깥으로 배제되었대요, 왕따가 된 거죠. 코로나 때 마스크를 받으러 시내에 가거나 모내기할 때 물을 대주고 시내에 농약이나 볍씨를 받으러 갈 때 할머니들이 나가기 힘드니까 보통은 이장님이나 젊은 분들이 대신 받으러 가거나 차에 태워주는데. 이분들은 그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왔던 할머니가 낙락장송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매일 힘들고 고민하는 너무 평범한 할매더라고요. 저라면, 저는 싸움을 포기하고 공동체에 다시 들어갔을 것 같거든요."
그날 전경림은 투사가 아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던 주민으로서 한 할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배제되는 순간의 서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본인에게는 아름답고 한적한 드라이브 길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몇십 년을 싸우고 버텨야만 하는 투쟁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고 했다.
5년 후 다시 히로시마로
5년 전 가벼운 마음으로 갔던 나가사키와 올해 다녀온 히로시마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또한, 왜 그는 다시 히로시마에 다녀왔을까?
"코로나 때문에 이 행사를 못 하다가 8월 히로시마에 갈 때 저희 회원들을 설득해서 함께 갔거든요. 제가 느꼈던 일본의 보건의료 선생님들과의 연대감이나 피폭의 문제점 등을 다른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이번에는 사전 세미나를 많이 했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되었죠. 인하대 최규진 선생님이 민의련을 소개해주었고. <방사선피폭의 역사>와 후쿠시마 원전 노동자를 다룬 <최전선의 사람들>, 오에 겐자부로의 <히로시마 노트>를 함께 읽었어요. 이번에는 이분들을 만나기 전에 조금 더 이해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준비를 해 간만큼 히로시마는 5년 전의 나가사키와는 달랐는데, 특히 피폭자들의 증언만큼이나 그들을 치료했던 민의련 소속 후지와라 선생의 강의가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피폭된 고아로 살아온 분의 증언을 들었어요. 부모님이 사망하고 언니와 본인이 살아남아 지금은 피폭자 상담소를 운영하는 분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실제로 그분들을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도 참 좋았어요. 선배로부터 환자를 볼 때 피폭된 후 일본 사회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조폭이 되거나 강도가 되는 분들이 많은데. '왜 저렇게 사냐고 묻고 비판하기보다는 이분들의 배경이나 피폭 이후의 삶을 한 번 더 고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이 참 감동을 주었어요. 현재의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피폭자들이 평생 어떤 배제와 차별, 낙인을 받아왔는지를 고민하고, 왜 국가나 사회에서 지원을 받지 못했는지를 고민하면 현재 피폭자의 아픔과 상처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전경림은 한사코 본인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겸허하게 말했다. 나가사키, 합천, 밀양, 삼평리 그리고 후쿠시마 등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목격한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현장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을까?
"예전에는 쉽게 판단했던 문제를 이제는 쉽게 말하기 어려워졌어요. 히로시마에서는 나가사키에서 너무 쉽게 던졌던 질문을 고민하게 되었고요. '왜 피폭자들은 반핵운동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어쩌면 폭력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피폭된 몸으로 오랜 시간 싸워 피해자나 희생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의 투쟁도 의미가 있지만, 반대로 '왜 넌 당사자인데 안 싸워?'라고 묻는 것은 타당한 질문인가. 처음에는 싸우지 않는 분들이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제삼자인 우리가, 내가 그분들에게 던지기엔 너무 폭력적인 질문이 아닌가. 우린 그분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등을 고민하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활동가나 운동가도 아니고, 현장에 가서도 이분들을 그저 짧은 시간 관찰한 정도가 다예요. 그래서 저는 '탈핵 잇다' 인터뷰를 하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죠. 근데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5년 전 나가사키를 갔을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렸고, 내년에도 다시 나가사키에 꼭 가려고요. 제가 대표로 있을 때 최대한 많은 회원과 가서 이야기도 듣고 또 민의련 선생님들과 어떻게 우리가 연대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보려고요. 두 번째로 가는 나가사키이니 느낌이 다르겠죠. 제가 받았던 고민이나 감동을 다른 회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요."
현장과 사람들을 잇는 연결고리, 씨앗 그리고 연대
▲ 청도 삼평리 주민들 청도 삼평리 주민들 |
ⓒ 전경림 |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저는 현장과 사람들에게 연대하려고 해요. 그게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고립되어 힘들게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힘이 될 수도 있고, 그 연대가 또 다른 씨앗이 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연대'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잖아요."
연대라는 단어는 "한 덩어리로 서로 굳게 뭉침, 혹은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전경림은 자신이 우연히 방문했던 나가사키 이후 여러 현장을 보고 들으면서 더 많은 사람과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그렇게 전경림의 연대는 더 많은 '전경림들'로 이어지고 확대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고민과 크고 작은 활동들이 더 많은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그가 2024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민의련 참가자 교류회에서 한국 참가자들을 대표하여 했던 말 중 일부를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핵무기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핵발전. 어디에도 '평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재난과 위험, 자본과 국가와 권력의 공고한 결합이 빚어내는 폭력은 국경을 넘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위험천만할 뿐 아니라 하청노동자, 농어촌 주민, 사회 약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핵발전은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 국경과 국적을 넘어 핵발전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평화 공존의 반핵연대를 이어갑시다. 히로시마에서 민의련과의 교류, 한일연대를 잊지 않고, 일상의 힘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탈핵잇다 시즌 2은 ‘숲과나눔 소규모 연구모임 지원사업 풀씨연구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글은 브런치(https://brunch.co.kr/magazine/no-nuke)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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