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은 진인출세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윤영 기자]
▲ 수운 최제우 대신사 유허비 *동학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 대신사께서 태어나신 곳*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는 동학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 대신사께서 태어나신 집터가 있다. 이곳 집터는 수운 대신사가 20세 때에 일어난 큰 화재 때문에 집과 아버님의 유물이 대부분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로부터 대신사는 처자(妻子)를 울산의 처가에 의탁한 후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된다. 지금은 복원된 수운 대신사 생가 초입 우측에 포덕 112년(1971)에 세운 유허비가 서 있다. |
ⓒ 천도교중앙총부 |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은 신라 말기의 석학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25세손이며 정무공 잠와 최진립(貞武公 潛窩 崔震立) 장군은 7대조가 된다. 수운 선생은 아버지 근암공과 어머니 한씨(韓氏)사이에 만득자(晩得子)로 태어난다.
수운 선생은 1824년갑신년(甲申年) 10월 28일(음력)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경주,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며,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 자(字)는 도언(道彦)이었다. 후일 구도 과정에서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바꾸었고, 호는 수운(水雲)으로 정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불렀던 이름 '복술(福述)'은 어머니 한씨 부인이 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당시 경주 지역에서는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복술이라 이름 짓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아버지 근암 최옥 선생(近庵 崔鋈 先生)이 낳은 귀한 자식이라 귀동자를 부를 때 '복술'이라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별명처럼 따라다녔다.
훗날 호(號)를 수운(水雲)이라 지은 것은 경주 최씨 시조(始祖)인 최치원 선생의 자(字)가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어서 운(雲)자를 넣은 것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시인 김지하는 수운 선생 일대기 담시에서 제목을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 목말라 하는 대지, 만민과 만물의 생명의 근원인 물과 구름은, 수운(水雲)의 호가 뜻하는 상서로운 이치가 있다 하겠다.
수운 선생의 탄생 이야기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 이야기로 시작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신라 말기 대학자이자 도인(道人)으로 알려졌다. 고운 선생에 대한 설화에 의하면, 신라말기 정치의 혼란을 보고 가족을 이끌고 전국을 떠돌다가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에 의해 고운 선생은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집안 식구와 함께 가야산 해인사 이웃에 살았는데, 고운 선생은 주로 해인사에서 수양하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교중기록이나 설화집에 의하면, 고운 선생이 남긴 게송에 이르기를, "우리 동방에 신령한 기운이 어려 있어 나의 후손 중에 반드시 세상을 개조할 큰 성인(聖人)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운 선생이 말한 그가 우리나라 문헌(文獻)의 종장(宗匠)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수운 선생을 가리키는 말로써, 세상을 빛낼 경서를 남기고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될 성인(聖人)이 최씨 문중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고운 선생의 '난랑비 서문'에는 '나라에 본래부터 전해오는 도(道)가 있어 유불선(儒彿仙_유교·불교·선교)을 포함하니 이를 일러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하느니라.'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먼 옛날부터 유·불·선(儒·佛·仙)의 삼교(三敎)사상을 내포한 풍류도(風流道·風流徒)가 있었는데 인간과 만물을 살리는 근원적인 진리가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고운 선생은 아마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유교·불교·선교 및 여러 종파로 갈라진 원래의 도(道)가 자신의 후손을 통해 더욱 큰 무극대도(無極大道)로 세상에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낭랑비서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수운 선생의 탄생은 고운 선생의 예언적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시 조선말의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유행하던 각종 예언서에도 구세성인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전해지면서 진인출세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 구미산, 사흘 울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태어날 때 구미산이 기이한 소리로 사흘 동안 진동하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구미산이 사흘 동안 흔들리면서 울음 소리를 냈다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나, 수운 선생이 태어난 것은 큰 성인의 탄신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갑오년 동학혁명에서 일본군에게 엄청난 학살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적 해석도 가능하다. |
ⓒ 박홍규 |
근암공이 어린 아기를 지긋이 바라보는데 공자지도만물화생(孔子之道萬物化生)이란 글귀가 떠올랐다. 즉 '공자의 도(道)로 만물을 교화한다'라는 말씀을 '수운의 도(道)로 만물을 교화한다'라는 말씀에 빗대어 보면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산아 산아 구미산아 수운 탯줄 품은 산아, 만고풍상 세월 속에 너의 모습 변함없네. 아기 수운 탄생한 날 산기슭 작은집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방안에는 꽃향기 가득, 이 세상 길을 밝힐 수운 아기 울음소리, 산과 들이 화답하는 우렁찬 진동 소리, 하늘의 오색구름 내려와 감싸니 수운 아기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네. 산아 산아 구미산아 수운 탯줄 품은 산아 만고풍상 세월 속에 그날을 새겨다오. 그렇게 한 성인이 오시었네. 그렇게 우리 곁에 오시었네. 새 세상 새날을 열어줄 아기, 이 세상에 오시었네.
근암공과 한씨 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복술(福述)이는 잘생기고 영리했다. 얼굴은 구슬 같이 맑았고, 온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영롱하였다. 이때 설화가 한 구절 전해진다. 수운 선생이 태어난 날, 삿갓을 깊숙이 내려쓰고 걷던 노승 한 분이 집 앞을 지나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노승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응시하고는 산천이 울리는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크게 한 번 웃고 또 한숨을 깊게 두 번 내쉬었다. 앞의 큰 웃음은 인류 역사에 다시 없는 큰 성인(聖人)의 출세를 뜻함이요, 다음의 깊은 한숨은 성인의 거룩한 순도와 그로 인해 수만의 처참한 죽음을 예견하는 것이었으리라.
복술 아기는 아버지 근암공의 사랑과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또한, 어머니의 정성 어린 보살핌과 아들에 대한 사랑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기골이 반듯하고 용모도 수려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이를 할 때는 언제나 대장 노릇을 했다.
수운 선생은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얼굴은 관옥(冠玉)이요 풍채는 두목지(杜牧之)라." 특히 눈동자에 광채가 번뜩여서 동네 아이들이, 최제우에게, "너는 역적이 될 눈이야"라고 하자,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나는 역적이 될 것이니, 너희는 착한 백성이 되어라"고 하였다 한다.
훗날 수운 선생의 수양녀 주씨(朱氏)는 "눈이 무서워 바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의 상고사가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동학으로 드러났다"고 말한 김정설도 비범한 수운 선생의 모습에 대한 자기 할아버지의 말이라며 "호랑이 눈의 광채를 뿜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수운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하였다. 아버지 근암공의 학문을 모조리 전수 받았다. 근암공은 퇴계 학맥을 이은 뛰어난 학자였다. 수운 선생은 아버지 근암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이름이 경상도 일대를 뒤덮었다. 이곳 사람치고 우리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영남의 큰 학자였던 근암공은 "여덟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공부시켜 보면 재간이 있는지 없는지 성공할지 못할지를 알게 된다"며 열다섯 전에는 마소를 먹이거나 물 대기조차 못하게 하면서 만득자인 수운 선생을 가르쳤다.
복술 소년은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도 영특해서 동네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어린 수운은 어머니에게, "아버지께서는 의관을 벗으시고 안방과 사랑방을 마음껏 다니시는데 어머니는 왜 문 밖을 자주 다니시지 못하고 안방에 주로 계십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최제우는, '남자는 높고 귀하며, 여자는 낮고 천하다'는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모순에 강한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또 언젠가는 아버지 근암공에게,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면 먼저 절을 하는데, 아버지는 어째서 먼저 절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문 밖에서 "이리 오너라!"하고 하인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 대감이 찾아왔다. 이때 아버지가 급한 발걸음으로 나가 그를 방안으로 정중하게 절을 하며 영접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수운 선생은, '우리 아버지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하면서 평등하지 못한 인간 세상을 어린 나이에도 예리하게 관찰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여쭈어 바른 대답을 원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어린 나이의 수운, 신동이라 불릴 만큼 영특하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남녀차별과 불평등한 세상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이치와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동학대서사, 모두가 하늘이었다'는 계속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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