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전쟁… ‘정보 없음’ 가치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한림대 심리학과 최훈 교수 2024. 11. 1. 07: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가 있다. 스티브 잡스가 좋아했던 작품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한데, 그의 그림을 보면, ‘초등학생 우리 아들도 그리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만큼 단순하다. 특별한 형태를 띠지 않는 그의 그림 속 주인공은 색(color)이다. 단순한 색의 배열로 구성된 그의 그림은 묘한 감동을 준다. 색 자체가 예술로 승화되는 느낌이다.

하나의 사물은 형태와 색채가 어우러져 존재하지만, 우리의 뇌는 다양한 시각 정보를 따로따로 처리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형태와 색상은 뇌의 다른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처리된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마크 로스코가 행한 색의 미술은 뇌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색이 중요해서인지, 미술계에서는 색의 전쟁이 진행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블랙 전쟁(?)이었다. 검은색은 흥미롭게도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보통 무채색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색채가 없는 색’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모순적인가?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심리학에서는 밝기와 색채를 구분한다. 뇌의 V4 영역이 손상돼 생기는 대뇌색맹의 경우, 색채를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밝기를 지각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서 세상을 흑백 모드로 지각하게 된다. 그러니 솔직히 검은색은 색채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밝기의 영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검은색을 포함한 무채색들의 경우에는 흡수율로 정의된다. 보통 빛의 95~98%를 흡수하면 검은색이라고 본다. 그런데 2014년 영국의 한 회사가 빛의 99.6%를 흡수하는 물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반타블랙이라고 불리는 이 물질(혹은 색)은 역사상 가장 어두운 검정색이며, 인간이 만든 블랙홀이라고도 불렸다. 반타블랙이 단순한 물감이 아닌 이유는 이 정도로 빛을 흡수하면 우주산업·군수산업에서 큰 유용성을 갖게 된다. 실제로 반타블랙은 애초에 인공위성의 위장용 도료로 개발됐으며, 스텔스 제작에도 활용될 수 있다.

또한 반타블랙은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유용하다. 반타블랙으로 칠한 물건은 실제 반사되는 빛이 없기 때문에 표면의 굴곡 등은 모두 지각이 불가능하다. 반타블랙으로 칠한 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블랙홀과 같아 보이며, 필자의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반타블랙의 발명은 너무나도 혁신적인 일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2016년 아니쉬 카푸어라고 하는 건축가이자 예술가가 예술 목적에 관해 반타블랙의 독점 사용권을 사들이면서 발생한다. 워낙 비싼 가격이어서 개별 화가들이 사용하기에 어려운 물감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걸 혼자 쓰겠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아니쉬 푸어의 독점 사용을 못마땅하게 여긴 몇몇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반타블랙을 능가하는 색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스튜어트 샘플이라는 화가가 Black(블랙) 2.0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97.5%의 흡수율을 보이는 이 검은색은 반타블랙보다는 더 밝지만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단, 예외는 있는데 아니쉬 카푸어는 쓸 수 없다고 명시해 놓았다. 스튜어트 샘플은 Black 2.0 외에도 가장 핑크 같은 핑크색과 같은 여러 물감을 개발했는데, 모든 물감에 아니쉬 카푸어는 쓸 수 없다고 명시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스튜어트 샘플의 도발에 발끈한 아니쉬 카푸어는 스튜어트 샘플의 물감을 구입해서는 자신의 세 번째 손가락에 가득 그 물감을 묻히고서 자신의 SNS에 자랑스럽게 올린다. 그리고 얼마 후 스튜어트 샘플은 반짝거리는 물감을 개발하는데, 그 물감에는 유리 조각이 있어서 손가락을 넣으면 다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나름 치열했던 검은색 전쟁은 2019년 MIT 연구진이 빛의 99.995%를 흡수하는, 반타블랙보다 더 어두운 물질을 개발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특히 MIT 연구진은 이 물질을 비상업적인 활동에 한해 예술가들에게 제공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점에서 반타블랙과 대비되고 있다.

뭔가 유치한 듯 재미있는 검은색의 전쟁은 지각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도 흥미롭다. 우리의 보는 행위는 빛을 감지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있는 세포들이 망막에 맺힌 빛 에너지를 감지해 뇌로 정보를 보내면, 그 정보를 해석하는 것이 보는 행위, 즉 시지각(visual perception)이다. 이런 점에서 가장 어두운 검은색을 둘러싼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다시 말하면 시지각을 방해하는 노력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빛이 없다는 정보도 보는 행위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띤다. 정보 홍수의 시대. 각자 다양한 정보를 경쟁하듯 내어놓는 것이 미덕인 시대. 이런 시대에서 펼쳐진 정보 없음의 경쟁인 검은색 전쟁은, 뭔가 정신없이 갓생의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이 불과 물을 찾아 멍때리기에 심취하는 오늘날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눈을 감고, 정보 없음의 가치를 한 번 느껴보는 건 어떨까?

Copyright © 헬스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