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책과 길] ‘차별 극복’ 40년 독일살이… 여전한 ‘지적전쟁’
이은정 지음, 사계절, 220쪽, 1만6800원
우리는 한국을 잘 알고 있을까. 사랑하고 있을까. 저자는 40년 전 1984년, 독일이 분단 상태였을 때 서독 유학길에 올랐다. 현재는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 40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우리가 제대로 몰랐던 진정한 한국의 면면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게 해준다. 때로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중학교 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빠져 천문학자를 꿈꿨던 저자는 딸이 아나운서가 되기를 바라던 어머니의 강요로 정치외교학을 선택했다. 정치학개론 수업에서 만난 스승 덕에 사회과학의 바다에 빠지고 막스 베버의 나라 독일로 유학을 결심한다. 대학교 2학년을 마쳤을 때였다. 호기롭게 독일에 도착했지만 일주일 만에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표까지 끊었다. 비행기 탑승 직전 공중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한 달만이라도 놀다 와라”는 엄마의 한 마디가 독일에서 40년을 있게 했다. 요즘 저자는 교환 학생으로 온 한국 유학생이 적응을 못해 면담을 신청하면 “언제 돌아가도 좋으니 이왕 온 거 한 달만이라도 놀아 보라”고 권한다.
독일에서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차별이었다. 대학 시절 스터디 그룹을 조직할 때 교묘한 방식으로 배제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보수적인 독일 학계는 젊은 외국인 여성에게는 가혹했다. 차별을 딛고 어렵게 2001년 교수자격논문을 통과한 뒤 정교수가 된 것은 2008년이었다. 그 사이 독일연구재단에서 받은 한 통의 편지는 잊히지 않는다. 교수자격을 갖춘 학자에게 주는 장학금을 신청했지만 ‘외국인 여성’ 학자는 독일에서 교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장학금을 줄 수 없다고 알리는 공식적인 편지였다. 저자는 2016년 300년 역사를 가진 베를린-브란덴부르크 학술원(옛 프러시아왕립학술원)의 최초의 비서구, 동아시아 출신 정회원이 되면서 독일 학계에 멋지게 한 방을 날렸다. 저자는 “한국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간 우리 학생들이 내가 독일에서 겪은 것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면서 “한국 대학생에게 강의할 때마다 외국인으로 차별당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자주 이야기한다”고 했다.
독일인들에게 한국학은 생소한 학문이다. 베를린자유대학에는 이미 1912년에 중국학과와 일본학과가 개설됐지만 한국학과는 2008년 부임한 저자가 첫 번째 정교수였다. 교수 한 명 없이 독일인 한국어 선생님이 소장직으로 대행하고 있던 한국학과 겸 한국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중국과 일본만 있는 줄 알고 있는 독일인들에게 한국의 존재를 알릴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한국 통일부의 요청으로 통일 후 독일연방정부가 체제 전환과정에서 통합을 위해 펼친 정책을 정리한 ‘독일통일총서’ 30권을 2010년부터 10년간 작업해 완간했다.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대 교수들과 북한의 조선 서원을 연구하기도 하고 베를린자유대 계절학기 수업에 김일성대 학생들과 한국 대학생의 자연스런 만남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저자는 “통일을 달성하는 것과 통일 이후 하나의 체제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문제”라며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삶의 경험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을 독일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을 알리려는 노력도 적극적이다. 신입생들이 매년 10월 새학기가 시작될 때 한복을 입고 연하장을 찍는 것이 연례행사가 됐다. 한국의 지인들에게 부탁해 장롱 속에 잠자고 있던 한복을 모아들여 지금은 80여벌을 마련했다. 매년 여름이면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에서 서머스쿨을 진행하고 있다.
2008년 이전에도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10여명 있었다. 대부분 교포 자녀나 부모님 중 한 명이 한국사람이었다. 이유를 물으면 정체성을 찾고 싶다거나 어머니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어서라는 답이 나왔다. 지금 50~60여명의 신입생 대부분은 독일인들이다. 동기를 물으면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다수는 K팝을 통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저자는 “한류 열풍으로 인해 지금 독일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일본을 먼저 접하지 않고 그냥 한국을 좋아하게 된 첫 번째 세대가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기성세대와 학계에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 저자는 이들과의 싸움을 마다치 않는다. 아직도 독일 기성세대는 K팝을 “저급한 대중음악”으로 취급하고, 한국학 학자들 중에서도 “쓰레기 같은 음악”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한국의 방역 정책이 성공적이었다는 점이 입증됐지만 독일에서는 어떻게든 깍아내리려고 들었다. 한국에서 마스크 착용이 보편화된 것도 권위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유교문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폄하했다. 저자는 “독일과 서구 사회에는 필요에 따라 유교를 이상화하거나 폄하하는 문화주의적 전통이 뿌리 깊게 내려 있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회가 19세기 근대화 경쟁에서 낙오한 것, 20세기 경제발전에 성공한 것, 그리고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가 겪은 것 모두 유교문화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럽 중심주의적 지적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베를린의 한복판에서 날마다 지적 전쟁을 치르고 있다”면서 “이 전쟁에 임하는 최고의 무기는 논리적으로 그들을 납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 세·줄·평 ★ ★ ★
·우리가 몰랐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유럽의 생생한 한류 열풍을 실감할 수 있다
·글도 참 좋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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