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 투병에도 늘 베풀어… 최선 다한 삶에 감사합니다
날씨가 선선했던 1998년 가을의 어느 날. 스물여섯 살 김미영(51)씨가 인천의 한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쪽에 선한 인상의 정수연(사망 당시 53세)씨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김씨를 향해 조용히 웃으며 꽃다발을 건넸다. 동네 미용실 원장님의 소개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지난달 28일 인천 모처에서 만난 김씨는 그날을 떠올리며 “원래 알고 지낸 것처럼 편안했다”고 말했다. 종교가 같았던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는 금방 풀어졌고, 월미도 놀이공원으로 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친구처럼 시작된 연애 1년 뒤 둘은 부부가 됐다. 연년생 두 아들 찬(24)과 훈(23)까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뤘다. 하지만 결혼 25년 만인 지난 2월, 뇌출혈로 쓰러진 정씨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리고 3월 15일, 정씨는 인하대학교 병원에서 심장, 폐장, 간장, 좌·우 신장을 기증해 5명을 살린 뒤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내내 평탄한 건 아니었다. 신혼 때만 해도 건강한 편이었던 정씨가 결혼 6년 차를 맞은 2004년 2월부터 몸에 이상 증세를 겪기 시작했다. 갑자기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을 제외한 온몸의 털이 빠졌다. 정씨는 곧장 인하대병원에 입원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담당 의사는 정씨의 머리카락까지 전부 빠지고 두피에 흰색 반점이 생긴 뒤에야 서적을 뒤져 병명을 찾는 데 성공했다. ‘보그트-고야나기-하라다 증후군’. 의사도 책에서만 보던 희귀병이라고 했다.
이 병은 탈모, 백반증, 난청 등을 동반하는 난치성 자가 면역 질환이다. 스테로이드 제제가 유일한 치료법인데, 당시 증세가 심각했던 정씨는 약물을 복용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까무잡잡했던 피부는 하얗게 변했고, 시력과 청력은 손상을 입었다. 병원도 찾지 못하는 답을 찾고자 아내 김씨는 곳곳의 문을 두드렸다. 국내 희귀병 환우회에 연락하고, 외국의 관련 기관에도 편지를 보내며 남편을 위한 치료법을 찾아 헤맸다. 발병 1~2년쯤 됐을 땐 치료의 실마리를 찾길 바라며 남편 정씨와 함께 일본의 한 병원도 방문했다. 하지만 그곳의 의사도 현재 복용 중인 약물의 용량이 너무 많다는 것 외엔 뚜렷한 조언을 해주지 못했다.
김씨는 좌절했다. 그런데 오히려 정씨 본인은 그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찾았다. 스스로 건강을 관리해 용량이 많다고 지적된 스테로이드제 약물을 줄여 나가보기로 다짐한 것이다. 정씨는 그때부터 수영, 조깅, 권투 등 운동을 쉬지 않았다. 식단도 채식 위주로 바꿨고,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직장 생활도 계속했다. 희귀병을 앓는 내내 단 한 번도 회사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노력 끝에 정씨는 결국 스테로이드제를 완전히 끊는 데 성공했다.
정씨의 꾸준함은 늘 ‘한결같은’ 태도와 연결된다. 정씨와 중학생 시절부터 같은 교회를 다니며 우정을 쌓아온 40년 지기 함민규(53)씨는 정씨에 대해 “항상 밝게 웃고 화를 내는 적이 없었던, 한결같았던 친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수시로 통화하고 만나던 각별한 사이였다. 정씨의 하나뿐인 여동생도 “언제나 배려하고 양보해주던 오빠”라고 말했다.
이젠 성인이 된 아들들에게 정씨는 장난꾸러기 같은 아빠였다. 김씨는 아이들이 어릴 적 잠들기 직전까지 아빠와 ‘괴물 놀이’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김씨는 “남편으로서도 참 다정했다”고 추억했다.
정씨는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멜라닌 세포가 파괴되는 희귀병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피부에 화상을 입으면서도 교회 주차 관리 봉사를 도맡아 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는 교회 청년들의 이름과 소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정씨는 종이의 빛이 바랠 때까지 수시로 들여다보며 청년들을 위해 기도했다. 정씨가 다녔던 교회의 이창주(47) 목사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든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던 분”이라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준 당신, 고마워”…“다시 꼭 친구 하자”
그런 정씨가 쓰러진 건 갑작스러웠다. 김씨는 지난 2월 29일 야간근무를 하던 중 ‘아빠가 거실에 쓰러져 있다’는 둘째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인하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된 정씨는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위급 상황이라 바로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예후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이 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 속에 김씨는 지난해 11월 직장에서 ‘웰 다잉(well-dying·품위 있는 죽음)’ 교육을 받은 뒤 남편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정씨는 희귀병을 앓는 자신도 가능하다면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고 했다. 투병의 고충을 알기에 아픈 사람들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친구 함씨도 “수연이가 장기기증에 대해 자주 말하곤 했다”고 기억했다.
입원한 지 2주 만에 뇌사 판정이 내려졌다. 김씨는 시댁 식구들에게 생전 남편의 뜻을 전했다. ‘목숨 수(壽)’자에 ‘못 연(淵)’자.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의 이름처럼 살 수 없게 된 아들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장기기증에 동의했다.
자가 면역 질환은 암처럼 전이되는 병이 아니라서 장기기증이 가능하다. 그래도 담당 의사는 꼼꼼하게 정씨 관련 자료를 살핀 뒤 기증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이식 수술을 진행했다. 담당 코디네이터였던 정민주(31)씨와 오세민(39)씨가 2박3일 동안 진행한 혈액검사에서도 수치가 좋게 나왔다고 한다. 김씨는 “남편이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씨의 장례식장은 한걸음에 달려온 지인들로 북적였다. 특히 “정씨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던 교회 청년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장례식장 한쪽에 마련된 포토존은 정씨에게 고마웠던 일화를 기록한 쪽지들로 가득 채워졌다.
김씨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최선을 다해 살아줘 감사하다”고 했다. 함씨는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한 정씨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것만 같다며 울먹였다. 한참 동안 마지막 인사말을 고르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다시 보자. 그곳에서도 꼭 친구 하자.”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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