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가 필요해
평소처럼 쇼츠를 넘겼다. 〈SNL 코리아 리부트〉 시즌6(이하 〈SNL 코리아〉)의 새로운 영상이 떴다. 여느 때처럼 낄낄거리며 보다가 잠깐, 어딘가 불편했다. 여자가 친일파 때려잡는 남자친구를 “오빠 나 뭐 바뀐 거 없어?”라며 ‘고문’하고 들들 볶는 장면이었다. 큰일 하는 남자를 열받게 하는 여자 캐릭터를 보며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쇼츠에 편집된 장면의 결론은 여자친구에 대한 화풀이를 친일파에게 하는 바람에 남자가 영웅이 됐다는 식이었다. 제목은 ‘각시탈을 영웅으로 만든 건 바로 여자친구’ ‘각시탈도 피해갈 수 없었던 여친의 수수께끼’ ‘여친 거울치료 하는 각시탈’ 등등. 찜찜함이 자꾸 나를 쿡쿡 찔렀다. 이 짧은 영상에서 내가 얻은 건 뭘까? 박장대소? 정보? 공감? 남은 건 그저 허탈하고 불쾌한 마음뿐이었다. 웃고 싶어서 본 영상에 묘하게 괴로웠다. 이유는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의 부재. 코미디는 사전적 의미처럼 웃음을 주조로 인간과 사회의 문제점을 경쾌하게 다룬 극 형식이다. 저 쇼츠에는 코미디의 어떤 요소가 담겼을까? 웃음을 주조로 하지만, 인간과 사회 ‘문제점’을 다뤘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한편 1975년 미국 NBC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자 〈SNL 코리아〉가 뿌리를 둔 〈세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이하 〈SNL〉)는 어떤 모습일까? 50년 가까이 장수한 이 프로그램은 제69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버라이어티 부문 최우수상부터 21개의 프라임 타임 에미상과 피바디 상 수상을 비롯해, 미국 방송 명예의 전당 헌액까지 이뤄냈으며, SNL 크루로 발탁된다는 건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미디언의 길을 걷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처럼 수많은 스타를 배출해 냈다. 이 유서 깊은 코미디 쇼의 최고 시청률을 경신한 에피소드 몇 개만 참고해도 〈SNL〉의 성공은 금기 없는 신랄한 풍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배우 티나 페이는 2008년 미국 대선 3일 전, 정치가 사라 페일린을 패러디했다. 명품 옷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페일린을 “이번 선거를 정말 비싸게 치르고 있다” 같은 대사와 옷을 소중하게 매만지는 연기로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와 백악관 참모들을 풍자한 에피소드는 7.2%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1080만 명의 시청자가 봤다는 뜻. 미국의 복잡하고 불편한 단위계를 비판하는 콩트는 미국을 비롯해 국내 대부분의 커뮤니티 사이트를 휩쓸며 ‘이런 게 진짜 세련된 유머’라는 댓글이 달리며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렇듯 〈SNL〉은 줄곧 정치, 사회 풍자와 더불어 공연을 진행하는 뮤지컬 게스트를 통한 복합 라이브 쇼를 표방해 왔다. 〈SNL〉이 총구를 겨눈 건 정치만이 아니다. 스칼렛 요한슨은 당시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의 브랜드 사업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방카로 분장한 스칼렛 요한슨을 비추며 “여성주의자, 여성 지지자, 여성 챔피언, 그러나 어떻게?”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버지인 트럼프의 여성 혐오 언행을 모른 척하는 이방카의 모순을 꼬집었다. 호스트로 출연한 아리아나 그란데는 모든 여성 투쟁의 순간을 노래로 쓴 ‘이건 페미니스트 노래가 아니야(This is not a feminist song)’를 불렀고 이후 음원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이처럼 젠더 문제를 비롯해 인종, 외모지상주의, 소수자 논쟁을 수십년 간 다뤄온 것이다. 패러디와 뮤직비디오, 콩트 등 시청자에게 쉬우면서도 참신한 방식으로 쇼를 이끌었고 대중은 이에 열광했다. 돌이켜봤다. 나를 묘하게 괴롭힌 〈SNL 코리아〉의 에피소드는 각시탈 쇼츠 영상이 전부는 아니었다. 지난 8월 전종서가 첫 주자로 출연한 리부트 시즌 6도 그랬다. 해당 회차는 트렌디한 셀러브리티 호스트와 새 시즌의 귀환 소식으로 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공개되고 며칠 뒤 전종서 편 ‘유토쨩 키우기’ 코너에서 ‘일본 덕후’ 여자친구 연기를 두고 유튜버 ‘류스펜나’의 콘텐츠를 떠올리게 한다는 대중의 의견이 홍수처럼 불어났다. 전종서의 개성 있는 일본 갸루 스타일의 메이크업과 해당 콘텐츠의 편집 스타일이 유튜버 ‘짜잔씨’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의견과 한·일 커플 유튜버 ‘토모토모’까지 가져왔다는 의견까지 잇따랐다. 대중의 언급이 쇄도한 건지 류스펜나는 “제 채널을 모르시는 분들이 언급하는 것을 보고 제 이미지가 그 캐릭터처럼 생각되는 것을 원치 않기에 이렇게 언급하게 됐다”며 자신은 그저 성적으로 어필되지 않으면서 패션을 좋아하는 취향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토로하는 글을 게시했다. 짜잔씨 또한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던 중 어느 한 영상을 두고 그녀가 거론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중략) 논란은 뒤로하고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바로 그녀를 좋아해 주고 신경 써주는 작은 아기 새 같은 존재들이 많다는 사실”이라는 글과 함께 논란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들의 글은 마땅했다. 〈SNL 코리아〉라는 거대 코미디 쇼가 개인 유튜버 콘텐츠를 그대로 가져와 분량을 때우는 데 그치지 않고 원본에 없는 불필요한 성적 농담을 얹었기 때문이다. 성적인 농담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유튜버가 자신의 채널에서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기도 하다. 〈SNL 코리아〉는 유튜버 ‘미미미누’의 콘텐츠를 그대로 패러디해 ‘빅 재미’를 제공했지만 한 축에선 ‘〈SNL 코리아〉는 이제 맨날 뭐 따라하기만 하는듯’ ‘옛날 〈SNL 코리아〉는 이런 거 그냥 특별 출연으로 나왔는데 요샌 그냥 가져다 쓰네’ 같은 피드백이 따라붙었다. 그저 재미있다고 검증받은 최신 콘텐츠를 그대로 가져와 한시적인 웃음거리 외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패러디한 영상이 왜 대중의 인기를 끄는지, 그 인기에서 비롯된 사회 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웃긴 부분만 발췌하는 것에 그쳤다. 유튜버 류스펜나와 짜잔씨의 영상에는 패션을 사랑하는 소녀가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 요즘 유행하는 Y2K 감성을 좋아하는 이유 같은 것들이 담겼다.
하지만 〈SNL 코리아〉는 그저 이들의 콘텐츠를 이색적인 웃음거리로 삼기에 급급했다. 비판은 없고 조롱이 뒤섞인 패러디 문제와 함께 석연치 않은 부분은 더 있었다. 2030 여성을 어리숙하고 비이성적이며 기 싸움을 일삼는 세대이자 젠더로 만든다는 비판을 받은 ‘MZ 오피스’와 ‘인턴 기자’. 현 정부에 대해 과감한 비판은커녕 중립이라고 넌지시 표현하는 모습. 여성을 대상으로 특정한 프레임을 씌우고, 정치 풍자는 점점 미지근하며, 매회 뜨겁게 달아오르는 트렌드를 가볍게 패러디하며 웃음을 유도하는 〈SNL 코리아〉는 ‘파격적인 웃음, 과감한 풍자로 대한민국 트렌드를 이끄는 코미디 쇼’라는 프로그램 슬로건을 잊은 걸까? 어떤 편견 씌우기나 조롱 없이 그저 공감과 속 시원함만 느끼는 코미디 좀 하면 안 되나? 내가 사랑했던 이 코미디 쇼의 모습은 분명 신선하고 유쾌하며 주체적이었다. 여의도, 즉 국회의사당에 사는 국회의원을 텔레토비로 풍자한 코너 ‘여의도 텔레토비’로 세련된 블랙 코미디를 선보였고, 영화 혹은 드라마의 한 장면을 따와 소리는 그대로 두고 표정과 움직임으로만 연기하는 ‘더빙극장’도 있었다. 혹독한 취업세계를 게임 속 세상에 비유한 ‘GTA 헬조선’은 또 어떻고. 〈SNL 코리아〉의 뿌리인 미국의 〈SNL〉이 성공한 원인은 성역 없는 풍자라는 사실을 다시 짚어봐야 한다. 정치와 사회, 인간을 포함한 넓은 영역의 풍자와 비판이 전제된 패러디. 평범한 시민은 이걸 원한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대신해 줄 무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현실에서 부딪치는 혐오와 젠더, 기득권으로부터 억압을 재현한 코미디가 아니라, 비판하고 풍자하며 약자를 대변하는 코미디를 소망하며 외쳐본다. 코미디가 필요해!
〈SNL 코리아〉는 ‘파격적인 웃음, 과감한 풍자로 대한민국 트렌드를 이끄는 코미디 쇼’라는 프로그램 슬로건을 잊은 걸까? 어떤 편견 씌우기나 조롱 없이 그저 공감과 속 시원함만 느끼는 코미디 좀 하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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