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뇌경색, 여동생의 뇌종양... 몇 년간 계속된 고통

이정애 2024. 10. 3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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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4-2] 문밖으로 나가자 진짜 내가 보였다

'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기자말>

[이정애]

-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4-1] 지금의 나, 너무 좋다

우물 안의 '나', 인생 쓴맛 제대로

결혼 후 첫째 아들을 바로 임신해서 아이 낳고 집안일만 했다. 남편은 재단사였는데 그 일을 그만두고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다. 운전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을 접하게 되고, 그러면서 손님들의 불륜 관계를 접할 때가 있다 보니 모임, 학교 동창회 등 내가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나는 조금은 답답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지만 싸우는 것이 싫어서 참았다. 그래도 여섯 가구 건물에 네 가구 엄마들이 또래 친구, 동생이어서 우리끼리는 이웃사촌으로 여기며 친하게 지냈다. 남편들이 직장에 나가면 아침마다 만나서 커피 마시며 수다 떨고, 점심 때가 되면 함께 밥 먹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직장생활 하며 내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하면서 큰 소리도 냈을 것 같지만.

4년 터울로 둘째 딸이 생겨 아이들 키우는 데만 더 신경을 쓰며 지냈다. 그러다 여동생들이 서울로 직장을 잡고, 남동생은 학교를 서울로 다녀서 함께 살게 되었던 때가 있다. 아이들은 이모, 삼촌과 함께 지내는 걸 엄청 좋아했다. 요즘도 우리 애들은 이모, 삼촌과 함께 지냈던 때를 종종 얘기하며 좋아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남편 형님이 하시던 LPG 가스 가게를 남편과 함께 운영하였다. 남편은 영업관리, 직원 관리를 하면서 가스배달까지 했고, 나는 전화를 받고 사무실을 관리했다. 당시 애들은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녔는데, 나의 일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친정 부모님이 시골에서 올라오셔서 우리 애들을 돌봐주셔서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었다.

가게를 운영하면서는 직원들 삼시세끼는 물론 빨래까지 해주었다.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했고 힘들지만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직원들도 "사모님 같은 분은 처음"이라며 엄청 고마워했다. 그 덕분에 직원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우리 가게에서 일해줬는데, 아마 돈 버는 재미로 그 힘든 일을 해낸 것 같았다. 그렇게 3년을 하고 남편은 다시 택시 기사를 했다.

그즈음 우리 집에 경사가 생겼다. 둘째 여동생이 집 고쳐주는 TV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는데 당첨된 것이다. 그 덕에 주방과 거실을 깔끔하게 수리했고, 또 방송에도 나오면서 가족 모두 너무 행복해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또 우연히 조그마한 한식 식당을 하게 되었다. 남편이 택시기사를 하다가 그곳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는데 자주 가다 보니 식당 주인과 친하게 되었고, 그녀의 권유로 그 식당을 넘겨받게 되었다.

나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고, 남편은 배달하며 홀 서빙, 그리고 주방 설거지까지 했다. 2007년에서 2017년까지 10여 년 동안 식당을 했다. 8평에 식탁 5개 놓고 시작했는데, 손님이 많았다. 이미 아이들이 다 커 아들은 직장생활을, 딸은 대학에 다닐 때라 집안일 걱정 없이 일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힘든 식당을 운영했는데, 그때는 젊은 기운으로 해냈던 거 같다. 후회는 없다. 나름으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업주부로 지낼 때는 조금 답답했다. 남편과 같이 가게와 식당을 운영하긴 했지만,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의 아내, 애들의 엄마로만 살았다. 나를 위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었다고 할까? 긴 결혼 생활을 돌아보니, '결혼'은 여성에게 틀에 박힌 삶을 살게 하는 것 같다.
ⓒ 픽사베이
그렇게 별 일 없이 잘 지내다가 친정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는데, 몇 번의 고비를 넘기시더니 세상을 떠나셨다. 2년 뒤 둘째 여동생이 뇌종양으로 투병하면서 우리 가족은 너무 괴롭고 슬픈 시간을 보냈다. 1년쯤 누워 있던 둘째 여동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엄마는 하루도 눈물을 멈추지 않으셨다. 엄마는 매일 기도하며 여동생 생각으로 괴로워하시다가 1년 뒤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우리 가족은 모두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엄마를 간호했는데, 3개월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남은 3남매는 힘들고 슬펐다. 나는 그동안 큰일 없이 잘 지냈는데, 이 시기의 몇 년 동안 가장 큰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식당을 한 지 7년째 되던 어느날, 남편이 "이제 그동안 못했던 것, 여행도 하면서 즐겁게 살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남편이 폐암에 걸렸다. 그래도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이 잘 되어 잘 지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술과 담배를 했다. 그러다 1년 뒤 폐암이 재발했고, 다른 데까지 전이되었다.

혼자 장사를 하고 매일 병원에 드나들며 2~3개월 정도 간병을 했다. 남편은 평소처럼 말을 하면서 괜찮은 듯했지만,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안 좋아졌고, 결국 애들을 다 불러서 보고는 눈을 감았다. 나와 애들은 괴롭고 슬펐다. 그렇게 남편이 우리 곁을 떠난 뒤 나는 식당을 접고 집에만 있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 지내며 집에만 있다 보니,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고 너무 허전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려 밖으로 나갔고 무조건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친정 동생들과 우리 애들이 매일 교대로 찾아와 나를 혼자 두지 않으면서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앞으로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계속 무의미하게 집에 있었으면 우울증이 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밖으로 나오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나며 '나'라는 자신을 찾게 되었다.

날개를 펴고 나의 세상을 날다

남편과 사별 후 집 밖으로 나갔다. 장사하며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모임도 만들고 산악회도 가입해 사람도 만나고 여행도 다녔다. 혼자라고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즐겁게 지내며 그동안 살면서 못했던 것을 하면서 살맛이 났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막상 집 밖으로 나와져 보니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집안일과 식당을 운영한 경험밖에 없었다. 2017년 직업소개소를 찾아가 가입하고 식당 시간 타임 알바를 시작했다. 하다 보니 옆에 동료들이 "식당은 힘들다. 가정집 가사도우미는 어떠냐?"고 해서 가사도우미로 일주일에 세 번 하며 2년 넘게 하였다.

일을 하다보니, 어차피 할 거 4대 보험 되고 퇴직금 있는 곳에서 하는 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 소개로 주 5일 일하고 4대 보험에 퇴직금이 있는 빌딩청소에 지원했다. 가사도우미를 그만두고 몇 개월 쉬고 나서, 2021년 2월 1일 세브란스 빌딩에 첫 출근을 했다. 처음 직장생활을 해서 조금 긴장하고 어색했다. 제일 힘든 층을 받았지만, 열심히 일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짝꿍 언니를 통해 몇 명 언니, 동생들과 알고 지냈다. 모두 성격도 좋다며 나를 좋아했다.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냈다.

내가 받은 곳이 힘든 층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무런 사고 없이 1년 하고 쉬운 층으로 갔다. 1층 로비로 지정받았는데, 소장이 부르더니 "1층 로비가 문제가 많았던 곳인데, 제발 조용히 원만하게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우리 네 명은 1년을 지내면서 한 번도 문제없이 너무 잘 지냈다.
 필자가 입사하기 전인 2017년에도 연세재단빌딩분회 조합원들은 꾸준히 투쟁을 이어갔다.
ⓒ 공공운수노조
입사하고 나서 분회장님의 권유로 노조에 가입하였다. 큰 망설임은 없었다. 노조에 가입하고 몇 개월 지나 짝꿍 언니가 집회를 가야 하는데 나보고 가라고 했다. 처음 집회에 참여하자, 매번 집회 있는 날은 내가 가게 되었다. 난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선뜻 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집회는 처음에는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재미도 있었다. 우리가 노조 활동을 해야 우리의 근무 조건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체협상도 우리가 필요한 것을 협상해서 좋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2년 뒤 부분회장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부분회장이 되면서 책임감은 더욱 강해졌고, 지부 회의도 참석하면서 다른 분회 분회장님들과도 인사하고 지냈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단어도 낯설고 모르는 것도 많고, 컴맹이기도 한 내가 너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임원이 되어 노조활동을 하며 회사 일을 알아가니 회사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지만, 조합원들의 목소리도 다양하다. 잘한다, 쓴소리 모두 들렸다. 나는 일하는 동안은 열심히 노조활동을 할 것이고, 노동법도 좀 더 공부하고 우리 조합원들을 위해 더 나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열성적으로 하는지 나도 모른다. 힘들기는 하지만 나 한 사람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한다. 우리 투쟁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라도 더 들리도록, 교육을 받으면 더 힘이 생긴다. 부족하지만 내가 더 앞장서서 일할 것이며 퇴직하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일할 것이다.

난 나에게 힘을 준다. 이정애 파이팅!

덧붙이는 글 | 이정애씨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연세재단빌딩분회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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