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선생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

이윤영 2024. 10. 3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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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대서사, 모두가 하늘이었다 3] 문헌에 없는 수운의 어머니

[이윤영 기자]

▲ 수운 최제우 대신사 부모님이 살았던 가옥의 상상도 수운 최제우 선생 아버지 근암공은 구미산 기슭의 마룡동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가난한 선비였다. 수운 선생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와 어머니 한씨 부인이 살았던 집을 박홍규 화백이 상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 박홍규
태양이 품속으로

근암공이 제자들의 계속된 요청을 변함없이 사양함으로 양자인 제환까지 나서 설득하였고, 결국 제환과 제자들은 편법을 써서라도 스승을 결혼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2월 초 어느 날 길일을 잡아 결혼 잔치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한씨 부인을 먼저 방에 모신 제자들과 가족들은 근암공이 방안에 드시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근암공과 한씨 부인의 결혼은 당시 혼인 절차를 행하지 않았는데 제자들을 거느린 양반집 가문이요, 학문이 높은 선비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간소한 절차로 혼인이 치러진 이유는 한씨 부인이 결혼에 한 번 실패한 청상과부 즉, 재가녀(再嫁女)라는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근암공은 가족과 제자들의 뜻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무리 간편한 결혼이라 하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하시며 양자인 제환을 불러 맑은 물 한 그릇을 떠오도록 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방 안에 있던 한씨 부인을 모시고 나오도록 했다. 간단한 절차지만 청수(淸水)를 모시고 혼례를 치러야 정식 부부가 되는 것이기에 그런 조치를 지시한 것이다.

특히 지난 간밤에 와룡(臥龍)이 잠에서 깨어나는 예사롭지 않았던 꿈을 생각하며 제자들과 가족의 청에 따랐던 것이다. 전날 해가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한씨 부인도 조카의 설득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결혼에 임하게 된다. 이 결혼은 서로 홀로 된 근암공과 한씨 부인의 정식 결혼이었다. 다만 한씨 부인이 한 번 혼인했다가 재혼했으므로 당시로는 재가녀의 신분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성종 때에 왕조의 근본을 이루는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예전에 밝히기를, 재가녀자금고(再家女子禁錮) 즉, 재가한 여자가 낳은 자녀에 대하여 벼슬길을 제한하였다. 근암공은 한씨 부인이 첩이 아닌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였기 때문에 자손이 서자가 아니었지만 당시의 법과 제도에 의해 차별을 받아야 하는 사실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은 재가녀를 취하지 않는 전통이 있어 최씨 가문의 체통을 생각해야 하는 고민도 있었다. 이런 제도를 잘 아는 근암공은 한씨 부인을 맞이하면서 마음이 무거워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하늘의 뜻이요 운명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명적인 만남이 조선의 역사를 뒤흔들며 개벽 세상을 여는 동학을 포태함은 물론 그 동학이 세상을 일깨우는 위대한 역사 창조를 이끌어가게 될 줄이야.

옛적부터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워지면 세상 사람들은 진인이나 성인의 탄생을 기대하게 된다. 성인이 탄생하는 배경은 무언가 다르게 전해진다. 뭔가 남다른 특별한 부부 인연, 탄생의 특이함, 배경의 신비로움 같은 게 깃들기 마련이다. 어떤 왕은 알을 깨치고 나왔다, 어떤 성현은 하늘이 점지하여 출생하였다, 어떤 성인은 하늘이 온갖 고생을 시켜 만백성의 표본으로 성장시켰다는 말들이 전해오지 않던가.

와룡이 잠에서 깨어나고, 태양이 품속으로 들어오고,그러한 꿈같은 이야기가 꿈이 아닌 현실이 된다. 위대한 성자가 되기 전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기였던 한 사람이.
▲ 수운 최제우 대신사 생가 복원도 동학 천도교 발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 생가가 2014년 복원되어 경주시와 천도교중앙총부 주최, 주관으로2014년 7월 7일 준공식을 했다.
ⓒ 천도교중앙총부
수운의 어머니, 기록된 내용이 없다

수운 선생의 어머니 한씨 부인은 동학의 역사는 물론 최씨 문중과 한씨 문중에서조차 철저히 감추어진 인물이 되었다.

공자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 어머니 안씨 부인에 대한 일화가 많이 나온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첩실(妾室)로 공자를 낳으나 계성왕부인(啓聖王夫人)이라는 시호로 추존하고 있다.

예수의 역사에서도 그 어머니 마리아는 성모(聖母)로 추존하면서, 거룩하신 동정녀로 세계 곳곳의 성당 앞에 동상이 세워져 신격화되었다.

그런데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의 세계 종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인존(人尊)을 천존(天尊)으로 남녀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동학·천도교가 이렇듯 수운 선생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무심한 것은 아쉽기 그지없다. 그래서 필자는 숨겨진 역사의 뒷면을 더듬어 최소한이라도 한씨 부인에 대한 조명을 시도해 보려 한다.

수운 선생의 어머니 한씨 부인은 근암공의 세 번째 부인으로, 당시 재가녀 신분이라는 결점 때문인지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는 물론 수운 대선생의 7대조인 최진립의 정무공파 문중의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근암공이 집필한 <근암문집>에도 정씨, 서씨 두 부인의 제문(祭文)은 있으나 한씨 부인에 관한 제문은 없다. 아마도 후일 근암공 행장을 정리하던 편저자가 재가녀의 신분 문제로 가문의 체면상 고의로 빼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간다.

동학과 천도교의 여러 주요 문헌에 '근암공의 한모 제자가 자신의 고모인 청주 한씨를 요즘 말로 중매하였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다. 한씨 부인이 근암공의 집에 와서 "저는 나이 서른에 금척리 친가에서 과부로 지냈는데,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져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태양이 품속으로 들어오며, 이상한 기운에 몸이 이끌리어 나도 모르게 이곳에 왔습니다"라는 몇 줄의 글이 교중 기록(동학·천도교)의 전부다.

한씨 부인을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숨겨진 이야기의 문헌을 찾아내고 구전, 설화 등을 정리하면서 뜻밖에 한씨 부인의 집안 되는 한영수씨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한영수씨로부터 한씨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니 수운 선생의 성격이 아버지 근암공보다는 어머니를 더 닮은 것으로 짐작되었다.

필자가 수운 선생에 대해 알아본 이야기와 한영수씨에게 들은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이렇다.

곡산 한씨 집안에서는 한씨 사모님을 대대(代代) 고모님이라 불렀다. 한영수씨는 "근암 최옥 선생 부인인 대대고모님은 청주 한씨가 아니라, 곡산 한씨(谷山韓 氏)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곡산 한씨의 시조는 한예(韓銳)이고, 송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1206년(고려 희종 2년) 고려에 들어와 문화시중평장사를 역임한 후 곡산부원군에 봉해진 사람이다. 그 뒤 후손들이 황해도 곡산에 살면서 본관을 곡산으로 하였다. 곡산 한씨들의 조상들은 원래 고구려에 살았는데, 삼국통일 당시 살았던 곳이 중국 땅에 편입돼 송나라에서 살다가 시조님께서 고려로 다시 돌아왔다.

곡산 한씨를 가리켜 중국 성씨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영수씨는 말했다.

"대만국립도서관에 가서 한예(韓銳) 시조의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없더군요. 저는 물론이고 곡산 한씨들도 우리나라 성씨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운 대선생 어머니는 근암공에게 재취로 시집갔다는 당시 조선 시대 문화 때문에 족보는 물론 집안 내력에도 자세히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한영수씨는 수운 선생의 어머니인 대대고모님에 대해,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집안 비밀 이야기라 하며 자세히 알려주었다고 한다. 경주 금척리에 살았던 수운 대선생 외가 집안은 동학에 들어가 큰 피해를 보았고, 일제강점기에 천도교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한영수씨 아버지께서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수운 선생이 남원 은적암에 간 이유도 당시 곡산 한씨들이 오래 전부터 남원에 살았기 때문이다. 곡산 한씨들은 임진왜란(1592~1598)전에는 서울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 후 조선 정부의 권고와 한씨 집안의 결의에 따라 임진왜란 당시 반으로 나눠 경상도와 전라도에 정착하면서 일본에 대항했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경주와 남원에 곡산 한씨 조상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현재 곡산 한씨 집안은 과거 집성촌의 영향으로, 주로 경주 금척과 광명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며 남원에는 일부가 거주한다.

곡산 한씨 가문은 남녀 평등을 철저히 실천하며 살아왔다. 여성들이 말을 타고 시장 보러 다녀 보수성이 강한 경주 일대에서 눈총도 무척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구려 기마 민족의 후예로 강한 여성상을 계승했다는 말도 전해 온다.

한영수씨는 특히 "교중 기록에는 저의 대대고모님 한씨 부인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오지 않고 있다지만 재가녀라고 해서 죄인처럼 살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씨 부인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온 것처럼 전해지는 것을 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보수성이 강한 경주에서 수운 선생의 혁명적인 기상은 아마 어머니 한씨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수운 선생은 득도 이후 경주에서 포덕을 시작하고 세상 사람들이 용담으로 몰려들자 관에서는 수운 대선생을 지목하기 시작한다. 이후 수운 선생께서 경상도 땅 경주를 떠나 잠시 은거한 곳이 전북 남원 은적암이다. 어떤 계기로 수운 선생께서 남원으로 가게 된 것일까?

한영수씨를 통해 교중 기록에도 없는 수운 선생 어머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영수씨의 이야기는 곡산 한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수운 선생 어머니의 집안 이야기는 남원 은적암과 동학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임이 틀림없다.

금척리는 지금도 곡산 한씨 집성촌이며 현재 수십여 호의 곡산 한씨들이 있다. 동학 연구가 삼암 표영삼 선생은 1984년 금척리 한씨 문중의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한씨 부인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고 한다. 아마 재가녀 신분으로 재혼을 했으니 양쪽 가문에서 기록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곡산 한씨는 인구조사에 의하면 2000년에는 1,562가구, 4,917명으로 조사되었다.

「수운 선생 어머니는 철저히 감추어진 인물이라지만, 숨겨진 역사를 들춰보면 여장부라 할 만하더라. 근암공의 성인적인 면모가 수운에게 이어졌다면, 한씨 부인의 올곧은 기상이 탯줄을 타고 수운에게 이어졌구나.」

-계속

덧붙이는 글 |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동학대서사, 모두가 하늘이었다'는 계속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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