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도 없던 그 시절, 엄마들에게 다짐받은 두 가지

유효순 2024. 10. 3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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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우물] '민들레집' 이야기

다큐멘터리 <열 개의 우물>이 2024년 10월 30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70-80년대 여성노동과 인천 빈민지역의 탁아운동을 함께 했던 여성들을 조명했다. 그녀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그 시대를 살았는지, 그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따듯하게 담고 있다. 가난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따듯하게 함께 품어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서 열 편의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말>

[유효순 기자]

'돌봄'의 어원 돌보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관심을 가지고 보살 피다'로 되어 있다.

1980년, 아직 어린이집이 없던 시절. 일꾼교회에서는 여성의 사회활동을 돕고자
1일 9시간 운영하는 어린이선교원을 시작했다. 처음엔 사회학을 전공한 교사가 어린이들을 보살폈으나 안전사고가 생겨 전문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듬해 여름, 선교원으로 취직한 대학선배가 나를 보자고 했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얼굴이 반쪽이 된 선배가 자기 대신 선교원에 가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보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느냐고 내가 물었다. 선배는 무서워서 도저히 못 다니겠다고 했다.

교회 앞, 전파 수리점이나 바로 옆 쌀가게에 형사가 죽치고 앉아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적어 상부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은 입에 쌍욕을 달고 살고 말투도 거칠어 무섭다고 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열심히 공부해서 유치원 교사가 된 나는 설마,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을 잡아가기야 하겠냐며 일단 가보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쉬고 있었고 특별한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민들레집 생활이 시작됐다
▲ 유효순 유효순(전 민들레 어린이집 교사).
ⓒ 유효순
다음날, 종로 5가에서 인천행 전철을 타고 화수동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 꼭대기에 '도시산업선교회'라는 간판이 보였다. 교회 이름 치고는 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찻길에도, 골목에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교회 앞 전파사나 쌀가게도 살펴보았다. 열어 놓은 유리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추격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르는 척 문을 밀고 들어갔다.

담임 목회자인 여자 목사를 만났다. 이를테면 일종의 면접이었는데, 목사는 대뜸 내게 어머니들의 조직을 맡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들 모임이라면 '자모 회의' 일 텐데, 그것은 내 주된 관심사이기도 했다. 졸업 후, 몇 년의 경험을 통해 어린이 교육, 특히 취학전 교육은 부모 교육이 동반되지 않으면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흔쾌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을 듣고 나서 목사는 서울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겠냐며 우려를 내비쳤다. 늘 개근상을 탔으니 걱정 말라고 답하자, 이번엔 문 앞에 형사들이 지키고 있다며 얼마 전 신용협동조합 직원 이OO 집에 형사가 찾아가는 바람에 이OO이 놀라 일을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선배한테 들었던 터라 나는 놀라지 않았다.

어두운 표정으로 마뜩잖아하던 목사는 한참 후에야, 남자 목사가 출장을 갔다며 이삼일 있다가 오는데 그가 돌아오면 의논해 보겠다고 결정을 미뤘다. 나는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다. 선배가 사표를 내서 당장 아이들을 돌볼 교사가 없다는 걸 아는데, 그 공백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천방지축이 될 텐데, 왜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목사, 정말로 바른말 해서 '감옥도 갔다 왔다'는 사람이 맞나? 나 역시 그런 의심이 들었다.

며칠 후, 눈빛이 날카로워 형사 같다는 말을 듣는다는 남자 목사가 웃으면서 "서울서 다닐 수 있겠어요? 이 동네에 방을 하나 구해서 자취라도 하셔야지... " 라고 내게 말했다. 그렇게 나의 민들레집 생활이 시작되었다. 출근 첫날, 통신문을 각 가정으로 보내 주말 저녁에 자모회의 소집을 통보했다. 새로 온 교사가 궁금했는지 일을 나갔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집을 빼고는 거의 참석했다. 참석률을 보고 놀란 여자 목사는 마뜩잖아하던 며칠 전과는 달리, 서울서 온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라며 나를 추켜 세웠다. 낯간지럽고 어색했지만 형식적인 인사라 생각했다. 나는 우선 자모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이들은 서울 유치원 같이 가르쳐 주고, 선생님은 오래 오래 다녔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말했고 이구동성으로 모두 동의했다. 아, 이분들은 서울을 동경하고 있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교사가 자주 바뀌어 불안한 마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자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도 2가지 부탁을 하겠으니 꼭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월 1회 자모 회의 참석과 2인 1조 식사 당번을 해 주셔야 합니다."
▲ 화수동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위치한 화수동
ⓒ 감 픽쳐스
교회 1층에는 교회 사무실, 주방, 그리고 방이 있었다. 선교원에서 지급한 비용으로 재료를 구매해서 조리한 식사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설거지까지 마치는 1일 식사 당번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드나들면서 어린이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보게 되고,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는 체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또 식재료를 직접 구입하고 정리하면서, 선교원의 재정 상황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을 매달 자모회의에서 논의하고 검토하면 선교원 운영 전반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모들은 주변 회사나 부두에서 일하거나 파출부 일도 나가니까 월 1회 휴가를 내서 선교원 봉사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모 얘기를 하니,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두 번째 자모 회의를 했던 날의 기억이다. 첫 자모 회의 때 선출된 자모 회장이 진행하고 총무가 기록하는 자리였다. 첫 번째 안건은 가을소풍이었다. 먼저 어디로 갈 것인지 의논하기로 했다.

"그야 두 말 할 것도 없이 송도지."

부두에서 조개를 까고 굴 채취 작업을 하는 상희 엄마가 씩씩하게 말했다.

"아우, 야! 송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애들 잃어버리기 딱 좋아. 안 돼!"
"어엇쭈? 이게 자모회장 됐다고 눈에 뵈는 게 없네? 야! 너 잘 만났다 이년아!"

벌떡 일어난 상희 엄마가 쏜살같이 달려들었고 둘은 엉겨붙어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온 몸의 세포가 정지된 것처럼 굳어있었다.

"아이고, 이년들아. 그만 싸워! 너네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냐. 야! 선상님 또 서울로 도망가시면 으쩔라고 그라냐?"

얼마 전 회사에서 해고되어 잠깐 교회 점심식사를 돕고 있던 연진엄마가 나섰다. 두 사람은 그 말에 갑자기 조용해지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이구 선상님, 제에송합니다요. 지가 워어낙, 사는 게 힘들다 보니 승질도 급해졌고요. 요, 주둥이에 욕이 줄줄이 매달려졌어요. 선상님, 서울 안 가실거쥬?"

상희엄마는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아양까지 떨었다. '아, 사는 게 힘들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다 보면 저렇게 된소리 센 소리라도 내질러야 숨을 쉴 수 있는 거구나! 그렇다면 선배가 그렇게 싫어하던, 교회 드나드는 젊은이들의 거친 말투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민들레 어린이선교원' 생활이 반년 지나 새 학기가 되었다. 신입생 모집을 했는데, 소문이 나서 지원자가 많이 몰렸다. 우리는 설립 원칙에 따라 부부가 일하는 가정 중에 형편이 더 어려운 가정의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가정 방문을 거쳐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가정 방문이라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날도 일과를 끝내고 좁은 비탈길을 올라 전봇대 앞에 잠깐 멈춰 숨을 골랐더랬다. 이쯤 어디인 것 같은데... 하며 다닥다닥 엎어져 있는 동네를 둘러보았다. 아직, 초가지붕도 있구나. 그런데 저 건너편 쌀가마니는 뭐지? 하는데, 그때 바로 그 거적때기를 들추고 구부정한 할머니가 나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뜨끔해서 엉겁결에 말을 건넸다.

"저기, 혹시 여기 김성춘네 집이 어디...?"
"아, 선상님이시쥬? 지달렸구만. 느추하지만, 어여 들어오슈."

할머니는 거적때기를 들추어 내가 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셨다. 황송한 마음에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니, 부뚜막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불을 때서 밥을 하시는구나?' 속으로는 놀랐지만, 애써 밝은 목소리로 상담했던 기억이 지금도 총총하다.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가게 됐을 때, 자모들은 헤어지기 싫다고 했다. 그렇다면
졸업생 엄마들끼리 친목회를 만들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졸업하는 햇수에 따라, 또 졸업하는 인원에 따라 83친목회, 85친목회, 86, 88, 89, 90 친목회가 생겼다.

86년 겨울, 약간의 보육료와 해외의 후원금으로 운영하던 선교원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친목회들은 '민들레 후원회'를 결성하고 공간 마련과 운영을 위해 수익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모아 온 빈 병이나 헌옷을 팔았는데, 수익이 별로 없자 과일 잼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또 일일찻집을 하거나, 삼계탕, 곰탕 등을 만들어 팔고 동네에 먹거리장을 열어서 김밥부터 부침개, 국수까지 정말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였다. 주변의 인맥을 동원해서 모금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민들레 공간이 마련되었고, 그 공간은 낮에는 취학 전 아이들을 돌보는 어린이집, 오후 5시부터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아이들이 없는 주말과 저녁 시간은 엄마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민들레집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이유
▲ 민들레집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전세로 마련한 민들레집
ⓒ 유효순
사십 여 년이 흐른 지금도 민들레는 존재한다.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들레 엄마들은 존재하기 위해 뭉쳤고, 뭉치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 민들레 공간에서, 식사 당번을 할 때는 아이들에게 '엄마 선생님'으로 불렸다.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때는 무시 당했다고 서로 싸우기도 했는데, 그래서 '회의 진행법'도 배웠고, 수익 사업하면서 요리도 함께 하고 장사도 함께 하는, 수완 좋은 만능 여성이 되었다. '아무개 엄마'로 서로를 불렀던 그들은 '아무개씨'라는 각자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서로를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함께 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게 됐다. 물론 민들레가 지금까지 이렇게 버텨온 것은 엄마들의 힘만은 아니다. 나는 오늘 그동안 민들레를 키우고 버틸 수 있게 애써주신 많은 분들의 이름을 이 지면에서 한 명 한 명 호명함으로써 그 분들의 노고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그렇게라도 박수쳐 드리고 싶다(존칭은 생략한다).

강정순, 강형숙, 김관숙, 김귀남, 김만순, 김순분, 김영희, 김정애, 박동순, 서성남, 신월성, 이경순, 이해진, 이현자, 유필남, 정봉자, 정순애, 정영례, 정영암, 정영자, 조경아, 조영금, 최경숙외 친목회원, 어린이집과 공부방 자모, 그동안 활동한 실무자들과 자원교사, 그리고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후원해 주신 후원회원님들.
▲ 유효순 민들레집 모임
ⓒ 유효순
가끔, 무엇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 사진처럼 소중히 간직해온 장면을 꺼내본다.

그래. 보름달. 일 년 중 가장 달이 크고 밝다는 팔 월 대보름. 이렇게 밝은 보름달을 보면 나는 생각나는 아이가 있다. 삼십여 년 전이다. 산동네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근무할 때, 꼭 이맘때였다. 추석을 지내고 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명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친구들! 맛있는 송편도 많이 먹고 달님에게 소원도 빌었나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저마다 인상 깊었던 명절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소통을 경험하게 하려면 한 사람씩 발표하고 이야기를 들어야겠지만, 사십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듣는 것은 무리였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도록 나는 잠시 기다리곤 했다. 귀를 활짝 열어 둔 채. 바로 그때였다.

"선생님!"
"그래. 영식아…."

한 아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손을 번쩍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냄새가 난다고 아이들이 함께 놀려고 하지 않는 영식이었다.

"선생님, 나는 보름달을 백 개나 봤다요?"

자신 있게 힘주어서 하는 말에 시끄럽던 소리가 잦아들며 모든 시선이 영식이에게 쏠렸다. 한쪽에서는 실없는 영식이가 또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달이 하나지 무슨 백 개냐며 시큰둥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서 봤는데요, 시골 우리 할머니 집 마당에서도 봤어요. 그리고 뒷동산에 올라갔더니 거기에도 있었고요, 냇가에도 있었어요. 또 세숫대야에서 봤고요, 우리 할아버지 술잔에도 있었어요. 내 동생 눈에도 있고요, 그리고…."

그날 나는 영식이의 뛰어난 관찰력과 감수성에 감동했다. 풋풋한 교사였던 내게 만감이 교차하게 했던, 풍부한 감성의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중년이 되어 가고 있을 그는, 잘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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