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노동자 사연부터 기후위기까지, 6분에 담긴 고찰

김성호 2024. 10. 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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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868]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

[김성호 기자]

부산의 어느 영화사로부터 영화평 청탁과 함께 영화 상영 뒤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해달란 요청을 받았다. 독립다큐상영회를 주최하는 이 영화사의 제안은 이번이 두 번째, 먼저 것은 일정이 맞지 않아 거절을 한 터였다. 잊지 않고 다시 제안해 준 것이 고마워서 나는 한 달음에 부산으로 달려가기로 결정한다.

상영될 작품이 무엇이냐 묻자 "<봄바람 프로젝트> 아시죠?"란 답이 돌아온다. 영화평론가란 직함이 무색하게도 금시초문, 정말이지 난생 처음 ㄷ듣는 이름이다. 민망함을 딛고 그게 무어냐 물으니 2년 전 있었던 투쟁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라 한다. 이번에 상영될 작품은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다시, 바람이 분다>라며, 그 영화의 속편 격이 된다고. 말하자면 나는 원작도 보지 못한 채, 심지어는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속편을 다루게 된 것이다. 절로 얼굴이 발개질 일이다.

그로부터 마음을 담아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를 살펴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맡은 일도 일이거니와 작품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특별한 의미를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는 2022년 있었던 봄바람 순례단의 전국 순례로부터 출발한다. 코로나19가 불러온 팬데믹으로 전국이 비상사태를 겪고 있던 2022년이다. 그와 같은 고립과 단절이 누구에겐들 달가웠겠냐만 특별히 더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있는 것이다.

전국 각지의 투쟁현장, 그곳에서 저항하고 농성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빼앗기고 짓밟혀 상처투성이가 된 억울한 이들이 이 나라 각지에서 버텨내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대중매체 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고립과 단절엔 자기 바깥의 다른 누구를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고립은 더욱 깊어지고 단절은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 스틸컷
ⓒ 봄바람 프로젝트
고립과 단절 깨고 '연결'을 외친 이들

그러나 세상엔 잘못된 일을 바로잡자 외치는 이들이 있다. 봄바람 순례단 프로젝트는 그와 같은 이들에 의해 출발했다. 길 위의 신부라 불리는 성직자이자 활동가 문정현이 그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출발하여 전국 각지의 저항현장을 찾은 뒤 서울에 이르는 40일 간의 순례가 이 프로젝트의 골자를 이뤘다.

순례단이 찾은 전국 현장만 60여곳에 달했다.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 대구 이슬람 사원, 경남 밀양 송전탑, 사드 기지가 들어선 경북 성주 소성리, 5·18 희생자가 잠든 광주 망월동, 세월호 침몰참사 아픔이 깃든 진도 팽목항과 목포신항, 강원도 삼척 석탄발전소 건설현장,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집회, 분단의 현실이 스민 DMZ 평화길까지 전국 각지를 오갔다. 서로 다른 이유로 맞서기 어려운 상대에 저항하는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현장에 고립돼 있었다. 지나간 국가폭력 또한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로 평안하지 못한 오늘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를 연결 짓고 상처가 물러 덧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봄바람 순례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순례는 일회적 작업이다.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떠나면 지난 자리에서 이뤄진 일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씻겨나갈 뿐이다. 그리하여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주를 이룬 이른바 기록활동가들은 그 현장을 영상으로 남겨 기억하고자 했다. 그저 남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 더 많이, 더 널리 알리고자 했다.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의 출발이 꼭 그러했다.

모두 18편의 짤막한 다큐가 이어 붙은 옴니버스 영화다. 113분의 러닝타임이 90분까지 줄어든 통상적인 영화의 상영시간에 비해 다소 긴 건 사실이지만, 편당 주어진 시간으로 환산하자면 6분을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하다. 각 6분의 시간이 각 편을 감독한 이들에게 부여돼 제 현장의 이야기를 담는데 소요된다.

저항의 현장이란 길고 지리한 역사를 담고 있을 밖에 없다. 누군들 천막을 치고 크레인에 오르며 피켓을 들고 삭발을 하고 싶을까. 그들을 거리로 내몰고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게 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때로는 국가이고 또 때로는 자본이며 특정인의 부도덕함과 국민적 무관심이 원인이 될 수 있겠다. 이들로부터 빼앗기고 짓밟혀 거리로 나올 밖에 없었던 사연을 풀어내는 것, 그를 단 6분의 시간 안에 해야 한다니 어지간히 가혹한 프로젝트가 되겠다.
▲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 스틸컷
ⓒ 봄바람 프로젝트
6분 남짓 짤막한 영상에 담긴 '저항'

영화는 크게 다섯 개 장으로 나뉜다. 포문을 여는 건 '기후위기의 시대', 그 안에 ▲월성원자력발전소 인근 주민 이주대책 마련 ▲삼척화력발전소 추진 반대 ▲밀양 고압 송전탑 문제 ▲청주 하이닉스 LNG 발전소 건설 관련 의제가 담겼다.

다음은 '빼앗긴 노동', ▲아시아나 항공 '하청의 하청' 아시아나 케이오 청소노동자들이 무기한 무급휴직이란 업체의 요상한 요구에 저항하며 시작된 싸움을 다룬다. 이어 ▲현대건설기계 사내하청 노동자 문제 ▲사전 합의 없이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제주 칼호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연 ▲한국장학재단 콜센터 노동자들의 싸움이 연이어 등장한다.

세 번째는 '있다, 잇다'란 이름으로,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과 야생동물까지 이어지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장이다. ▲성소수자 활동가가 마주할 수 있는 혐오에 대한 이야기부터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본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지리산 개발과 관련해 발언권을 갖지 못한 야생동물의 시선 ▲전장연이 왜 욕을 먹어가며 시위에 나서는지를 하나하나 살핀다.

네 번째 장은 '기억 투쟁'이다. ▲봄바람 순례단의 진도 팽목항 방문을 기록하고 ▲세월호와 스텔라데이지호 유가족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비추며 ▲코로나19로 촉발된 의료공백 가운데 사망한 경북 경산 청소년 정유엽 군의 사례를 들춰 공공의료체계의 문제를 고발한다.

마지막은 '평화연습'이다. 분단된 현실, 미·일·중·러로 이어지는 4대 군사강국 가운데 끼인 한반도의 상황 속 평화를 도모하는 일의 엄중함을 일깨운다. ▲군산 지역 군사기지의 확장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는 거주민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순례단이 평택 미군기지를 찾아 걷는 풍경을 소개하며 ▲사드가 설치된 소성리 현장의 모습이 담겼다.
▲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 스틸컷
ⓒ 봄바람 프로젝트
선명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모두 18편의 짤막한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한국사회에 상당한 의미를 가진 현재적 문제다. 더 중하고 시급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고, 또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뜻을 같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들이 싸우는 현장이 한국사회에 실존한다는 사실을 아는 건 투표권을 갖고 국가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한다. 불행히도 한국의 언론은 이와 같은 문제를 꾸준하며 충실하게 보도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장의 활동가들이 발 벗고 나서 찍어낸 이와 같은 영상이 더더욱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여긴다.

물론 한 편의 영화로 아쉬움이 없는 작품은 아니다. 봄바람 순례단의 기록을 담았다곤 하지만 담긴 18편의 영화가 모두 그와 긴밀히 조응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순례단의 모습이 인상 깊게 들어간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전혀 상관없이 촬영한 작품을 그저 한국사회의 일면이 담겨 있다는 이유만으로 묶어 놓은 것도 적잖다. 어느 작품 가운데는 문정현 신부가 현장을 찾아줬다는 사실에 감격해 포옹하는 이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담겼지만, 또 어느 작품은 순례단의 모습이 단 1초도 보이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늘어놓기도 한다. 한 편의 장편 옴니버스로 완결성을 갖기 위해 서로 다른 단편을 응집케 하는 장치를 보다 고민했어야 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각 편마다 주어진 6분여의 시간이 매우 부족하단 점은 어찌할 수 없는 한계로 남는다. 사안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보는 이를 움직여 문제의식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해 6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 아닌가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이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는 치밀한 고심이 보이는 작품이 드물다. 대부분은 만듦새가 성기고, 또 상당수는 활동가를 카메라 앞에 앉혀 그 이야기를 듣는 평이하고 편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여성주의 활동가 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편은 봄바람 순례단의 순례와는 전혀 별개인 데다 저항의 현장마저 전혀 보이지 않아 이와 같은 작품에 함께 포함될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 스틸컷
ⓒ 봄바람 프로젝트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가 이어져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코로나19 가운데 고립된 여러 현장을 잇는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게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저항의 현장이 있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 가운데 여러 문제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의 흐름에 의해 이뤄진다는 건 적잖이 의미심장하다.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아마도 문정현 신부가 여러 인터뷰에서 따로 언급한 것과 같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일 텐데, 사업장이며 그 소유주가 달라져도 현장의 노동자가 겪는 고충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쓰임이 없으면 쉽게 버려지는 노동자의 고통 가운데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단 것도 충격적이다. 이들 문제가 2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에서 거의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것, 심지어는 악화된 경우도 심심찮게 보인다는 것이 더욱 참담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같은 현장을 잇는 것, 찾아온 신부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도록 하는 건 결단코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봄바람 프로젝트>가 어떤 방식으로든 속편을 맞이했다는 것 또한 그렇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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