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죽음 맞이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

정만진 2024. 10. 3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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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임수명(任壽命) 지사가 향년 30세에 음독 자결하였다.

임수명은 지사 고 신팔균 씨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지금부터 8년 전에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만주로 가 있었는데, 금년 음력 8월 초하루 신팔균 씨가 마적에게(박걸순 논문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신팔균 전사의 재조명〉에는 '중국군에게') 피살되었으므로 몸 붙일 곳이 없어 귀국하였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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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52 ] 10월 31일 세상을 떠난 임수명 지사

[정만진 기자]

 임수명 지사, 임수명 자살 동아일보 기사, 신팔균 지사
ⓒ 국가보훈부, 국사편찬위원회
1924년 임수명(任壽命) 지사가 향년 30세에 음독 자결하였다. 국가보훈부의 '2024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및 공훈록 '임수명'에 타계일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기일을 확인하기 위해 1924년 11월 4일치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를 찾은 다음, 대략 현대식 표기로 바꿔가며 읽어본다.
모녀 비관 자살 - 독립단 수령 신씨 유족

(전략) 임수명이라는 부인이 (중략) 한 살 된 딸과 함께 양재물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임수명은 지사 고 신팔균 씨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지금부터 8년 전에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만주로 가 있었는데, 금년 음력 8월 초하루 신팔균 씨가 마적에게(박걸순 논문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신팔균 전사의 재조명〉에는 '중국군에게') 피살되었으므로 몸 붙일 곳이 없어 귀국하였다.

그후 (중략) 아들의 자람만을 기다리며 근근이 연명하였던 바, 지난 31일에 셋째아들 현길이가 죽어버렸음을 극히 비관하여 하염없는 세상을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하고 (중략) 북향하여 고요히 모로 누워 주먹을 꼭 쥐고 최후를 맞은 부인의 죽음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창자를 끊어내는 듯하였다.(하략)

기사의 표현대로 임수명 지사의 죽음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슬픔을 안겨준다. 그의 짧은 생애를 잠깐 되돌아보는 것으로 고인을 추모하고자 한다.

16세 때 부모 타계 , 18세 이후 간호사 생활

지사는 1894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집안일을 도왔는데, 16세에 양친을 여읜 후 서울로 올라와 18세부터 병원 간호사로 일했다. 이때 일본경찰에 쫓겨 위장 입원한 신팔균 독립지사와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임 지사가 20세이던 1914년 결혼했고, 신팔균은 만주로 망명했다. 혼자 국내에 남은 임 지사는 신팔균의 동지인 신백우·서세충·엄익래 등에게 남편의 서신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에 힘썼다.

지도를 구하려 온 남편과 함께 중국 망명

1921년 신팔균이 일본 군용 지도를 입수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그녀는 만주와 북경으로 오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불과 3년 뒤인 1924년 남편 신팔균이 만주 싱징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 무렵 임수명은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였다. 충격으로 낙태를 하게 될까 염려한 주변에서는 신팔균의 죽음을 숨긴 채 그녀를 귀국시켰다. "귀국 후 힘겹게 살아가던 임수명은 10월 하순에 이르러 남편의 전사 소식을 확인(공훈록)"하였다.

게다가 병을 앓고 있던 셋째아들마저 이때 사망하였다. "극히 비관(동아일보)"한 임지사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음독 자결하였다. 박걸순은 그녀의 죽음을 "순열(殉烈)"로 규정했다.

애잔한 가족사가 보여주는 1920년대 아픈 역사

1924년 한 해 동안 남편 신팔균이 순국하고, 아내 임수명과 막내 신계영이 참담하게 죽고, 아들 신현길이 병사했다. 신팔균과 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신현충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30년 병고를 못 이겨 자살했다.

박걸순은 논문에 "가문 5인이 독립운동으로 비명에 스러졌다"면서 부부의 "애잔한 가족사는 1920년대 독립운동의 이면을 보여주는 아픈 역사"라고 썼다. 그러면서 이들의 "활동과 자결은 장신(將臣) 후예의 전통을 이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이러한 의미 부여가 다섯 고인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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