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떠난 우크라이나인 "그래도 여긴 대포는 없잖아"
지난해, 21살 신예진은 '희망'이라는 꽃말의 데이지를 품고 2023년 2월 26일부터 2024년 2월 25일까지, 365일동안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했습니다. 여행하며 만난 '삶의 이유를 찾는 여정'을 <너의 데이지>를 통해 풀어나갑니다. '데이지(신예진)'가 지난 1년 동안 여행하며 만난 사람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연재기사입니다. <기자말>
[신예진 기자]
유럽 여행을 시작하니 국경의 존재가 무색해졌다. 솅겐 국가를 자유롭게 오가며 도장 없는 여권이 익숙해질 무렵, 가을 날씨와 함께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여행자 커뮤니티 카우치서핑으로 호스트 레샤와 만나기로 했다.
올해 42살을 맞이한 레샤는 아들을 보내 나를 마중나왔다. 하얀 피부와 훤칠한 외모의 아들은 슬로바키아 사람을 처음본다며 연신 질문하는 내게 말했다.
"우린 우크라이나 사람이야. 전쟁을 피해서 작년에 왔어."
▲ 레샤가 만들어준 보르시 비트 뿌리 혹은 사탕무로 발효된 비트 주스를 끓여 만든 보르시(борщ, borscht)는 우크라이나 전통요리이다. 레샤는 퇴근 이후 나를 위해 보르시를 만들어주었다. |
ⓒ 신예진 |
"정부 지원 아파트여서 임대료를 내지 않지만, 계약이 내년까지야. 그 이후에는 다시 우리가 어디에서 지내야 할지 모르겠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레샤에 따르면, 그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아들과 함께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단다. 실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난민은 오늘날 830만 명이 넘는다고.
또 국내 실향민은 370만 명에 이른단다.
▲ 브라티슬라바 대통령 궁 앞에서 레샤와 함께 우린 저녁을 먹은 뒤 브라티슬라바의 거리를 걸었다. 550만 인구수인 슬로바키아는 ?낮과 같이 밤거리도 사람하나 없이 한적했다. 우린 슬로바키아 대통령궁 앞에서 사진을 찍고 구시가지를 한 바퀴를 돌며 거리를 음미했다. |
ⓒ 신예진 |
우린 슬로바키아 대통령궁 앞에서 사진을 찍고 구시가지를 걸으며 이야기 나눴다.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며 현재 생계 유지를 하는 레샤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가족이 그립지는 않아? 브라티슬라바에서 사는 게 힘들 것도 같아."
"그립지.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는 대포 소리가 나지 않잖아. 대포 소리를 들으며 안전하지 않은 데서 사는 것보다는 나아."
그의 대답은 충격 그 이상으로 뇌리에 박혔다. 정부 지원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삶일지라도 "대포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라 버틸 수 있다"라는 레샤의 답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전쟁을 겪으며 느꼈을 불안은 내가 당연히 누려온 평화라는 이름에 빚지고 있었다. 그에게 사과했다. 동시에 레샤가 자기의 아픈 이야기를 공유해준 데 고마움을 느꼈다.
"한국도 1950년에 전쟁이 있었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휴전상태야. 여전히 전쟁이 끝난 게 아니지."
레샤가 겪은 전쟁의 참혹함을 작게나마 공감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말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브라티스라바 거리를 걷는 레샤의 모습 밤이 깊어진 거리는 잔잔한 고요함이 바닥을 비집고 가라앉았다. 소박하고 작은 거리는 그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샤와 나는 브라티슬라바의 밤거리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 나눴다. 평화로운 브라티슬라바의 거리처럼, 레샤의 가족에게도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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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샤의 모습 레샤는 슬로바키아로 넘어와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다른 난민처럼 공장에 취직해 돈을 더 벌 수 있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더 좋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교사로 일했던 그는 훗날 아이들을 위한 자선 단체를 돕고 싶다고 덧붙였다. 많은 돈을 벌기보다 자기에게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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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레샤가 피난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난민 생활로 불안 속에 있으며 꿋꿋이 살아가는 힘은 무엇일까. 그 가운데에 레샤의 아들이 있었다. 자식은 전쟁이 없는 곳에서 키우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교사로 일했던 레샤는 훗날 아이들을 위한 자선 단체를 만들어 돕고 싶다고 덧붙였다.
2년이 넘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에게 큰 경제적, 인적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그 속에서 무고한 난민들은 일상을 잃고 고통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자신만의 삶의 이유로 삶을 이어간다.
밤이 깊어진 브라티슬라바는 잔잔한 고요함이 바닥을 비집고 가라앉았다. 소박한 거리는 그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하고 평온한 공기처럼 레샤와 레샤의 아들 삶에도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덧붙이는 글 | 기사는 기자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해당 기사의 원본 이야기는 기사 발행 후 기자의 브런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daisyp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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