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가 내게 믿음을 줬다. 나도 KT에 믿음을 주고 싶었다”
지난 21일 팀과 2년 계약 연장 발표
‘비디디’ 곽보성이 KT 롤스터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2019년 한 차례 블랙&화이트 유니폼을 입었고, 2023년 돌아와서 합류해서 2년을 더 활동했다. 그리고 앞으로 2년 더 KT의 미드라인을 지킨다. 지난 29일 서울 영등포구 KT 연습실에서 그를 만나 11월 이적 시장에 나가지 않고 KT와 일찌감치 재계약을 체결한 이유를 들어봤다.
-지난 9월 월즈 대표 선발전을 끝으로 2024시즌을 마무리했다.
“좋게 마무리 짓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 때마다 배우는 것들도 있다. 나는 어느 팀에서든 코치님들한테 ‘더 이기적으로 하라’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올해는 그 점을 정확하게 깨달았다. 메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머 시즌이 미드 AD 메타였다. 게임 안에서 내 성장이 중요했다. 내 위주로 게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시즌이다.”
-예전부터 라인 주도권을 활용한 로밍이 곽 선수의 특징이자 강점이었다.
“트리스타나·코르키는 라인전부터 뚝심 있게 성장에만 집중해야 좋은 챔피언들이다. 나는 그런 챔피언들로도 사이드에 붙어주고 전투에 참여하려고 했다. 그렇게 게임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몸에 배어 있어서 의식을 해도 어느샌가 그렇게 하게 되더라. 패배가 쌓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성장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깨달은 후부터는 성장 위주 스타일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런 메타 변화를 빠르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더라.”
-2024년 서머 시즌을 총평한다면.
“오랜만에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사실 올해 KT가 강팀이 아닌 중위권 팀으로 분류됐다. 그런데 강팀이라 불리는 팀들을 다 잡았다. 아무도 못 이겨본 젠지도 시즌마다 한 번씩 잡았다. 운 좋게 이긴 것도 아니고 우리가 실력에서 더 앞서서 이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더 잘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몰더와 요네로 인상 깊은 활약을 펼친 시즌이기도 했다.
“스몰더는 ‘데프트’ (김)혁규 형이 추천했다. 솔로 랭크에서 맞아보고는 ‘너무 좋아 보인다’면서 리플레이를 보여줬다. 안 그래도 AD가 주류고 1티어 챔피언 2개가 명확한 메타였다. 블루팀이 1개를 밴하고 나머지 1개를 가져갔을 때 레드팀이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스몰더를 연습해보니 성능이 좋더라. 더 연구해본 뒤에 꺼냈다. 요네는 사실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던 챔피언이다. 내 성장 위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고, 게임이 잘 됐을 때부터 해서 그런지 요네도 잘 되더라. 그리고 당시에 요네의 성능이 워낙 좋았다. 요네를 잘하는 선수들의 플레이 영상도 많이 보고 참고했다.”
-월즈 대표 선발전에서 T1에 석패해 월즈행 티켓을 놓쳤다.
“앞선 서머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T1을 만났다가 떨어졌는데 선발전에서 다시 만나게 된 상황이었다. 플레이오프 당시에 우리가 왜 고전했는지를 팀원들과 많이 얘기하고, 아쉬운 점을 보완하려고 했다. 사실 플레이오프 때도 우리가 충분히 이길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조금만 더 세심하게 플레이했다면 이겼을 것 같아서 선발전에서는 집중력을 잃지 말자고 했다. 라인 스와프에도 많은 신경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플레이오프 때 T1이 라인 스와프를 까다롭게 잘했다. 초반 라인 스와프만 잘 넘긴다면 중후반 운영은 우리가 상대에게 안 밀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도 정말 잘하는 팀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서 과감하게 플레이하면 상대가 위축되기 마련인데 우리가 그런 측면에서 밀렸던 거 같다.”
-지난 21일 KT와 2년 계약 연장을 발표했다.
“재계약 논의는 서머 시즌부터 했다. 2019년 성적이 좋지 않아서 KT와 1년 만에 찝찝하게 헤어지긴 했어도 사무국 직원분들과의 관계는 정말 좋았다. 이후로도 쭉 KT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작년에 다시 돌아와서도 여전히 좋은 곳이라고 느꼈다. 그런 감정이 이번 결정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물론 팀이 제시해준 조건이 좋아서 계약한 것도 맞다. KT가 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줬다.”
-곽 선수로서는 FA 시장에 나가서 시장의 평가를 받는 게 더 이득 아니었을까.
“KT가 내게 믿음을 줬으니 나도 KT에 믿음을 주고 싶었다. 소위 ‘간’을 보기 위해 FA 시장에 나가면 나한테 좋을지는 몰라도 KT로선 난처해질 가능성도 있다. 계약 연장에 거창한 이유는 없다. 팀은 내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나는 KT라는 팀이 좋아서 FA 시장에 나가지 않았다.”
-일부 포지션은 새롭게 보강해야 한다. 불확실한 로스터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는지.
“당연히 걱정이 있다. 그러나 만약 팀의 신인들이 1군으로 콜업된다면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 역할을 맡고 감수해야 할 만큼 나도 경력이 쌓였다. 전처럼 소위 S급 선수들끼리 팀을 짜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을 우선적으로 따질 시기는 지났다. 팀에 일단 내가 있으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1년이 아닌 2년 계약을 체결한 이유는.
“나는 예전부터 한 팀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몇 차례 둥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KT라는 팀이 좋아서 큰 고민 없이 2년 계약을 결정했다. KT는 편안한 분위기가 있다. 사무국 직원분들과 얘기해보면 생각이 비슷해서 좋다. 선수들이 큰 압박을 느끼지 않게 해주시고 소통도 자주 해주신다. 그리고 KT가 역사와 전통이 있는 팀 아닌가. KT라는 팀 자체를 좋아해 주시는 팬분들이 많다. 그분들이 응원을 보내주실 때 선수로서 받는 에너지가 기분 좋다.”
-KT로 돌아온 뒤 2년 동안 꾸준하게 좋은 활약을 펼친 비결은.
“거창한 비결은 없다. 노력과 자기객관화가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지금 무엇이 안 되고, 심리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서 조급해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올해는 혁규 형이라는 베테랑 팀원과 코치님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나는 늘 영상 시청을 통한 연구가 정말 중요하고 선수에게 도움이 많이 된다는 주의다. 다른 선수들이 같은 구도를 어떻게 다르게 해석하고 정립했는지를 참고하고, 나만의 해석을 만든다면 선수의 기량이 떨어질 일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상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면 성장에 도움이 될까.
“솔로 랭크에서 궁금한 구도가 나오면 다 챙겨 본다. 어떤 구도든 늘 반타작 이상의 성과를 내는 ‘쵸비’ 정지훈 선수는 다른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다. 영상을 보다 보면 ‘쵸비는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렇게 응용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른 팀의 대회 영상도 배울 게 많다. 선수마다 특정 상황에서의 대처 방식이나 사이드 관리법이 다르다. 우리 팀의 스크림과 대회 영상을 복기하면서 KT의 스타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도 한다. 갑자기 게임이 잘 안 풀리면 우리 팀의 스타일에 맞춰서 내 플레이의 방향을 바꿔본다. 요즘에는 일상에서도,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라인전 구도 생각이 난다. 뜬금없이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베테랑 김혁규의 조언도 도움이 됐다고.
“혁규 형의 팀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정말 좋다고 느꼈다.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이미 우리 팀의 현 상태는 어떻고,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안 되고 있는지를 다 생각해놓고 있더라. 당연히 다른 선수들도 팀의 문제가 무엇인지 각자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혁규 형에겐 그런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서 팀 전체가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고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초반에 유충과 용 중 특정 오브젝트 하나를 챙기는 쪽으로 초반 노선을 정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 지키지 않았다. 나는 막연하게 이질감을 느꼈다. 그때 혁규 형이 먼저 ‘우리 이렇게 하는 거 별로인 거 같다. 이쪽으로 뚝심 있게 해보자’고 하더라. 이건 하나의 예시일 뿐이고 그런 일이 정말 많았다. 혁규 형이 말할 때마다 사이다를 마시는 느낌이 들었다.(웃음) 정확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대단하다고 느꼈다.”
-내년 KT는 ‘비디디의 팀’이 될 가능성이 크다. KT를 어떤 팀으로 만들고 싶은지.
“게임도 잘했으면 하지만 무엇보다 팀 분위기가 좋은 팀이 됐으면 한다. 팬분들이 보시기에 플레이가 안정적인 팀이었으면 좋겠다. KT 별명이 롤러코스터 아닌가. 최근 UFC를 봤다. 응원하는 선수의 경기도 아닌데 괜히 마음 졸이게 되더라. 우리를 응원하시는 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경기를 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년엔 안정적인 게임을 하고 싶어졌다.”
-UFC 경기를 보다가 뜬금없이 팬 생각이 났나.
“맥스 할로웨이와 일리아 토푸리아의 경기였다. 할로웨이는 꾸준히 잘해온 선수고 토푸리아는 떠오르는 신성이다. 나는 내심 베테랑인 할로웨이한테 마음이 가서 그가 이기길 바랐다. 그의 팬도 아닌데 경기를 보는 내내 불안하고 마음 졸였다. 결국 할로웨이가 KO패를 당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고 한동안 멍하더라. 나는 할로웨이의 팬이 아닌데도 이런 기분인데…우리를 응원해주시는 팬분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싶더라.(웃음)”
-KT 경기가 화끈해서 좋아하는 팬들도 많은데.
“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서사에 매력을 느끼는 팬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경기를 선사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올해 KT는 하위권 팀들한테 덜미를 잡히기도 했다. 팬분들께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참….”
-앞서 재계약 발표 직후 ‘KT에서 아직 못 이룬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첫 번째 목표는 LCK 우승이다. 나도 LCK 우승을 해본 지 너무 오래됐다. 작년이 정말 적기였다고 생각해서 아쉽다. 그다음 목표는 월즈 우승이다. 당장은 아주 힘들 거라 예상한다. 아직 팀의 로스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만약 시즌 초반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팀원끼리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건설적인 얘기를 많이 나눴으면 좋겠다. 시즌을 치르면서 팀이 하나로 뭉쳐지는 과정을 정말 좋아한다.”
-차기 시즌에 반드시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내년 팀 KT 롤스터의 목표는 무조건 월즈 진출이다. 선수 ‘비디디’ 곽보성의 목표는 내년 팀원들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팀에 신인 선수들이 1군으로 올라올 수도 있다. 그들을 잘 이끌어나가되, 그 점에만 너무 매몰돼서 내 플레이까지 흐트러지는 일은 없게 하겠다. 신인들이 처음 1군에 올라오면 플레이가 잘 안 풀릴 수도 있다. 내가 좋은 기량을 유지해서 신인 선수들의 기량이 천천히 올라와도 문제없도록 만들겠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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