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病: 무너지는 신화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2024. 10. 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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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삼무원’…전례 좇다 잊힌 혁신
최고 보상인데 성과 ‘뚝’…리더십 ‘실종’

지난 3월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삼성전자와 한국 경제’라는 특집 기사를 두 편 썼다. 부정적이었다. 일본 전자 산업을 곤경에 빠뜨리며 전자 산업 거인으로 우뚝 섰던 삼성전자가 애플과 TSMC에 뒤처지며 선대의 성공 신화가 흐려지고 있다고 썼다. 그러면서 ‘대기업병’을 언급했다. 삼성전자의 대기업병은 최근 실적과 주가로 나타났다. 3분기 영업이익은 9조1000억원대로 시장 기대치를 크게 밑돌았다. 외국인이 연일 매도세를 이어가는 사이 주가는 5만전자에 머문다. 대기업병에 걸린 건 삼성전자뿐 아니다. 한국 경제를 성장시켜온 혁신과 근면함이 사라지며 재계가 온통 속앓이를 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한국 경제성장률은 2년 연속 미국에 추월당할 만큼 정체의 늪에 빠져 있다.

“개선안의 선례가 있나? 없다면 결재하지 않겠네.”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개발(R&D) 부서에 근무하는 30대 직원이 지난가을 상사에게 반도체 수율 개선안을 제출했을 때 들었다는 말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3월 도전하지 않는 삼성전자 문화를 신랄하게 보도했다. 이 직원은 “선례가 없기 때문에 시도하고 싶었다”고 호소했지만, 이 제안은 결국 거절됐다. 그는 “삼성전자에서는 최고의 급여가 보장되지만, 최근 수년간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니혼게이자이가 지적한 삼성전자 부진의 원인은 단기 성과주의다. 삼성전자에서 상무 이상급 임원 임기는 1년이다. 짧은 기간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재계약이 어렵다. 임원은 자연스럽게 장기 프로젝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출세 경쟁 속에서 임원은 단기 성과를 요구하고, 이 때문에 현장 엔지니어가 진득이 연구개발에 매진하는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문화에 지쳐 경쟁사인 SK하이닉스로 전직하는 엔지니어도 적지 않았다.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삼성전자와 달리, SK하이닉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만년 2위였던 SK하이닉스로서는 삼성전자를 따라잡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차이는 인공지능(AI) 핵심 반도체로 꼽히는 고대역메모리(HBM) 분야에서 SK하이닉스가 앞서나가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 국내 반도체장비 협력사 임원은 “SK하이닉스는 협력사 얘기를 들어주고 협업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삼성전자는 ‘전례가 없다’ ‘구체적인 안을 가져오라’는 식으로 일단 손사래를 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가 삼성전자 조직문화를 꼬집으며 언급한 단어는 ‘대기업병(病)’이었다. 삼성전자는 전례만 좇다가 혁신을 놓치며 HBM에서 주도권을 내줬다. (매경DB)
단기 성과 매몰돼 미래 놓쳐

혁신은 버리고 처우 높이고

니혼게이자이 분석은 우리에게 뼈아프다. 삼성전자는 한국 경제 주춧돌이다.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육박한다. 니혼게이자이가 이 특집기사에 ‘삼성전자와 한국 경제’라는 제목을 단 이유기도 하다.

니혼게이자이가 삼성전자 조직문화를 꼬집으며 언급한 단어는 ‘대기업병(病)’이다. 대기업병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조직이 비대해진 이후 혁신성과 효율성 추락, 과거의 성공 사례만 고집하는 문화, 사라진 부서 간 소통, 조직 이기주의, 사내 정치 등이 대표적인 징후다. 보통 스타트업이 성장해 대기업으로 진화한 뒤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때로는 삼성전자처럼 이미 대기업이지만 성장과 혁신이 떨어질 때도 대기업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전례만 좇는 것은 전형적인 대기업병의 단면이다. 최근 삼성전자 직원을 두고 ‘삼무원(삼성전자+공무원)’이라는 조롱 섞인 단어가 등장했다. 삼성전자의 보신주의를 꼬집은 것이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혁신을 이뤄내려면 세상에 없는 제품과 서비스를 내놔야 하기 때문에 전례를 베껴서는 안 된다”며 “전례를 참고하고 더 발전시켜야 하는데 대기업병에 걸린 기업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도 과거에는 전례에 매이지 않았다. 니혼게이자이는 삼성이 한때 ‘일본으로부터 배우자’는 경영 전략을 축으로 TV와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전화 사업에서 일본 기업을 제치고 세계 톱 기업으로 올라섰다고 평가했다. 이건희 선대 회장이 이끌었던 사업은 사업 쇄신을 반복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회장은 지난 2010년 “향후 10년 뒤 현재 사업은 모두 시장에서 사라진다”며 위기의식을 심고 혁신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이 회장이 병으로 쓰러진 뒤 10년간 삼성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옆걸음질 쳤다.

숱한 위기 극복해온 韓기업

미래사업기획단 위기 타개 선봉

삼성전자만 대기업병을 겪는 게 아니다. 국내 5대 그룹인 롯데 역시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고 정체 국면에 허덕인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디지털 전환(DT)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지만, 현장으로 내려가면 기존 오프라인 담당 조직과 온라인 담당 조직이 충돌한다. 온라인의 갈등으로 고전한다. 검색 서비스를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해온 네이버는 인공지능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카카오그룹 역시 혁신 대신 기존 시장 침투 전략만 쓰다 호된 비판을 받았다. 아울러 ‘혁신’ 대신 ‘보상’에 골몰한다는 불편한 평가마저 듣는다.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한 경우 ‘대기업병’은 더 심해진다. 카카오 성장 초기 회사 내에서 ‘신충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렸다. ‘신뢰 아래 충돌하되, 결정이 되면 헌신한다’는 의미였다. 초기 기업답게 직급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그 과정에서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충돌할 때 서로 의견이 다를 뿐, 상대방 역시 조직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신뢰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의사 결정이 끝나면 내 뜻과 다르더라도 충실하게 이행했다. 직원에게 한도 없는 법인카드를 제공한 것도 신뢰에 기반을 둔 덕분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카카오 내부에서 이런 문화는 사라졌다. 계열사끼리 갈등이 심하다는 얘기가 ‘신충헌’보다 더 많이 들렸다. 스톡옵션을 두고 직원들의 임원과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폭발했다. 데이터센터 장애 등 사고도 이 무렵 발생했다. 일부 직원은 카카오 조직문화를 두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부르기도 했다. 인력 규모나 시장점유율, 비즈니스 모델은 대기업 수준으로 진화했지만, 그렇게 조직문화는 성장을 멈췄다. ‘스타트업다운’ 혁신과 소통은 사라지고, ‘대기업’ 대우만 요구한다는 분석이다.

판교에 위치한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조직 규모가 커지면 혁신이 사라지고 관료주의가 나타나는 현상은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면서도 “덩치가 커지면 조직문화도 함께 개선돼야 하는데 일부 기업은 덩치만 커지고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혼란스러운 청소년 같다”고 평가했다.

대기업병 징후는 복합적이다. 매경이코노미는 과거 T-Plus컨설팅(현 EY한영에 인수)과 함께 기업병 10대 징후를 연구했다. 당시 금융감독원 자산 기준 100대 기업 중 민간 기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는 이랬다.

▲의사 결정력 부족으로 인한 유사 회의의 끝없는 반복 ▲자기 조직을 중심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관철시키려는 조직 이기주의 ▲상부 입맛에 맞게 운영되는 직급불패(職級不敗) ▲고객접점 부서 의견보다 관리 부서의 파워 강화 ▲외면되고 단절되는 고객의 목소리 ▲회의에서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이 주로 수용되는 고성불패(高聲不敗) ▲사내 정치(社內政治)와 인재 매몰 ▲어려운 일은 주인 없이 계속 표류하는 현상 ▲보고를 위한 무한대의 서류 작업 ▲과거 성공 방식을 고집해 조직 전체의 활동적 타성화 등이다. 꽤 오래전 연구지만 지금까지도 대기업병을 정의하는 데 무리가 없다.

물론 한국 기업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니혼게이자이와 인터뷰한 한 도쿄대 교수는 “삼성이 이대로 썩어갈 것 같지도 않다”며 “어딘가에서 승부처를 찾으면 그곳에 집중 투자해 활로를 찾는 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 앞으로의 대응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미래사업기획단이 위기 타개 선봉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미래사업기획단은 다양한 산업 분야의 핵심 기업 사례를 분석하며 돌파구를 마련하는 중이다. 미래사업기획단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 신사업추진단은 지금 삼성의 핵심 먹거리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용 전지와 바이오 사업을 발굴했다. 미래사업기획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조만간 삼성그룹의 신성장동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2호 (2024.10.30~2024.11.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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