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병’ 용어 만든 삼성 OB의 고언

최창원 매경이코노미 기자(choi.changwon@mk.co.kr) 2024. 10. 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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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기업, 제대로 이카루스 역설 빠졌다”
기계 조직→생체 조직…‘소속연개’ 핵심

30년 전 일찌감치 대기업병을 우려한 사람이 있다. 1979년 삼성그룹에 공채 입사해 그룹 비서실에서 이병철·이건희 전 회장을 보좌하고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과 삼성 계열사 사장 등을 역임한 윤순봉 전 삼성서울병원 사장(68)이다. 한국에서 처음 대기업병 키워드를 재계에 던진 인물이다. 윤 전 사장은 1994년 삼성경제연구소 소속으로 펴낸 책 ‘대기업병’에서 “기업이 시대 변화에 뒤처지고 낡다 보면 대기업병이 찾아온다”고 밝혔다. 윤 전 사장은 최근 재계에 번진 대기업병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가감 없는 고언을 들었다.

1956년생/ 연세대 경영학 학사/ 홍익대 경여전략 박사/ 1979 삼성그룹 입사/ 1991~2007년 삼성경제연구소/ 2008년 삼성그룹 브랜드전략 부사장/ 2009년 삼성석유화학 사장/ 2011년 삼성서울병원 지원총괄 사장/ 2016~2018년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윤관식 기자]
과거 성장 공식 얽매인 韓 기업

“수율로 컸는데 확률 게임하겠나”

“한국 기업은 수율 중심으로 성장했다. 제품 10개를 만들 때 10개 모두 양품을 만드는 게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시장을 이끄는 것들의 공통점은 ‘확률’이다. 제품 10개 중 1개를 제대로 키워내 수익을 내는 게 핵심이다. 제약사의 신약 개발 열풍과 빅테크의 인공지능 붐 모두 확률에 베팅한 결과물이다. 문제는 수율로 성공을 봤던 한국 기업이 확률 게임에 뛰어들 수 있겠냐는 것이다. 수율로 성공을 맛본 이는 절대 확률 게임을 이해 못하고, 수익 발생까지 필요한 ‘오랜 시간’을 참지도 못한다.”

윤 전 사장이 진단한 최근 대기업병의 근본 원인이다. 이른바 ‘이카루스의 역설(Icarus Paradox)’이다. 과거 성공을 이끈 강점이 어느 순간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틀린 말이 아니다. 대기업이 ‘새 먹거리’로 꼽는 바이오 산업만 봐도 알 수 있다. 롯데그룹은 신사업으로 바이오에 뛰어들었지만, 일명 바이오 파운드리로 불리는 ‘위탁개발생산(CDMO)’에 집중할 뿐이다. 삼성그룹 역시 오랜 기간 바이오를 이어왔지만 마찬가지다. 확률 게임인 신약은 인기가 없다.

그는 대기업이 ‘신흥 기업’에 자리를 내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윤 전 사장은 “신흥 기업 성장을 바라보며 전통적 대기업은 고민한다. 쟤가 하는 비즈니스 구조가 꽤 괜찮아 보이는데 우리도 투자해볼까. 문제는 딱 그 정도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사이드 프로젝트 정도로 발만 담근다. 성장을 이끈 주류 산업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투자하기 부담되기 때문이다. 그사이 신흥 기업이 제시한 비즈니스는 패러다임으로 떠오른다”고 말했다. 윤 전 사장의 설명은 최근 유통업계를 떠올리게 한다. 오프라인 중심으로 성장한 신세계와 롯데는 최근 온라인 중심의 쿠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각각 이커머스 플랫폼을 내놓기는 했지만 쿠팡 점유율을 한참 밑돈다.

결국 시대 변화를 읽고 행동에 옮겨야 대기업병을 탈피할 수 있다는 것. 반면교사 사례를 묻는 질문에 윤 전 사장은 본인 경험담을 꺼냈다. 1990년대 초반 모토로라가 진행한 ‘도둑놈 프로젝트(Bandit Pager Project)’ 관련 얘기다. 도둑놈 프로젝트는 일본 삐삐 회사들이 ‘저렴한 가격’ ‘빠른 출고’를 앞세워 미국 시장에 진출, 점유율을 끌어올리자 모토로라가 반격 차원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다.

윤 전 사장은 우연한 기회로 모토로라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 지역 모토로라 공장을 보게 됐다고 회상했다. 윤 전 사장은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게 뭐지’였다. 일본식 공장 시스템이 그대로 복제된 형태로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생산 과정은 물론이고 일하는 방식도 일본 그 자체였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모토로라 삐삐 가격이 떨어지고 수주부터 출하까지 단 1주일 만에 끝나더라”라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베끼라는 말이 아니다. 후발 주자의 새로운 비즈니스에서 성공 요인을 발견했다면, 끝장 보겠다는 각오로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해 기업에 적용하라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변화 적응 위해 생체 조직화”

‘치얼업’ 컨트롤타워 만들어야

윤 전 사장은 조직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기계 조직’과 ‘생체 조직’이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대기업병을 탈피할 수 있는 쪽은 생체 조직으로 봤다. 하지만 현재 한국 기업 대부분은 기계 조직에 가깝다. 윤 전 사장은 “수율이 중요하던 시대에는 구성원 각각의 ‘콘텐츠’보다 기업이 이끌고 가는 이른바 ‘컨테이너(외형 틀)’가 중요했다. 이 때문에 군대화된 기계 조직이 성과를 냈고 기업은 이를 선호했다. 문제는 더 이상 기계 조직으로 성과를 내기 힘든 환경이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업이 가야 할 방향성은 분명 생체 조직이고, 기업도 어느 정도 인지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재계 화두 중 하나인 컨트롤타워를 두고도 의견을 남겼다. 윤 전 사장은 “컨트롤타워는 필요하지만, 기계 조직 시절 컨트롤타워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단순 통제가 아닌 생체 조직 속 ‘뇌’처럼 조직과 구성원의 시너지를 높이고 ‘치얼업(Cheer Up)’하는 형태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윤 전 사장은 “과거 컨트롤타워는 군대 ‘헤드쿼터(사령부)’ 역할이었다”며 “기계와 생체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재조합 가능 여부다. 기계는 부품을 분해한 뒤에도 설계도에 따라 재조립하면 원본이 나온다. 하지만 생체는 어떤가. 한 번 나뉘면 생명을 잃는다. 가야 할 방향성이 생체 조직이고, 이미 기업은 조금씩 생체 조직을 구성 중이다. 그런데 기존 형태의 컨트롤타워를 다시 만든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겠느냐”고 되물었다.

윤 전 사장은 생체 조직화를 앞당길 방안으로 ‘소속연개(小速連開)’를 언급했다. ① 조직을 전문화해 ‘작은 조직’을 만들고(小) ② 이를 기반으로 필요한 사업을 빠르게 진행하고(速) ③ 각 조직을 연결하고(連) ④ 열린 형태로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라는 것(開)이다. 윤 전 사장은 소속연개 개념에서 봤을 때 국내 기업 중에선 ‘하이브’가 눈에 띈다고 밝혔다. 최근 잡음이 불거졌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지만, 큰 틀에서 레이블 중심 사업 운영 방향성에 긍정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다.

파킨슨 법칙이 밀려온다

경영자 덕목 ‘지·행·용·훈·평’

윤 전 사장은 기업의 대기업병 증상은 ‘저성장기’에 돌출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파킨슨 법칙’을 소개했다. 파킨슨 법칙은 영국 역사학자인 노스코트 파킨슨이 ‘영국 해군성’ 사례를 기반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① 조직이 클수록 업무량이 늘고 ② 어느 순간 업무량은 줄어도 인력은 늘어나는 현상이 펼쳐진다는 것. 윤 전 사장은 “구성원이 100명이라고 예를 들면, 보통 바보가 98명, 천재가 1~2명이다. 업무가 줄었다고 가정해보자. 바보가 머리를 쓴다. 굳이 없어도 되는 절차를 세우고, 불필요한 일을 만든다. 어찌 됐든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기업은 무너진다”며 “바보가 천재 뒷다리 잡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대기업병을 마주한 경영진의 덕목을 묻는 질문에 윤 전 사장은 넌지시 웃었다. 그러면서 ‘지·행·용·훈·평(知行用訓評)’을 언급했다. ① 머리로 알고(知) ②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行) ③ 목표에 적합한 사람을 채용하고(用) ④ 꾸준히 훈련하고(訓) ⑤ 결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라(評)의 줄임말이다. 윤 전 사장은 “故 이건희 회장의 말씀 중 여전히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2호 (2024.10.30~2024.11.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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