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간 들녘마다 하얀 메밀 익어가는…10월 제주는 [제주라이프]
결혼의 계절이다. 봄엔 더 그렇지만, 가을에도 수줍게 결혼 소식을 알려오는 이들이 많다. 청첩장을 열어보면 노란 유채꽃밭과 푸른 바다, 억새 핀 오름까지 이 섬의 사계절 풍경이 화보처럼 담겨 있다.
가장 눈이 가는 건 개화한 메밀밭이다. 검은 돌담과 흰 메밀꽃이 세련되면서 단아한 멋을 낸다.
메밀하면 강원도 봉평이 떠오른다. 학창시절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은 영향이 크다. 하지만 메밀의 국내 최대 주산지는 명실상부 제주도다.
2022년 제주지역 메밀 재배면적은 1665㏊로, 전국 재배면적(2259㏊)의 74%를 차지했다. 생산량은 1264t으로, 전국 총생산량(1982t)의 64%에 달했다. 지난해에는 1384t으로 생산량이 더 늘었다.
제주도는 메밀 재배면적이 넓은 데다, 온난한 기후 영향으로 2기작이 가능해 봄부터 제주 곳곳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밀꽃을 볼 수 있다.
봄 메밀은 4~5월에 파종하면 5월 하순부터 꽃을 본다. 가을 메밀은 8월에 파종해 9~10월에 꽃을 즐긴다.
이 무렵 제주 와흘리나 오라동, 서귀포 광평리에선 메밀 축제가 열린다. 메밀꽃이 끝없이 펼쳐진 중산간 들녘은 갓 쪄낸 포슬포슬한 백설기처럼 푸근하고, 정겹다. 선이 굵은 내륙의 메밀밭과 또 다른 풍경이다.
제주 사람들은 보리와 조를 주식으로 했다. 보리는 입동(12월 7일)에 파종해 망종(6월 5일)에 수확하고, 조는 소서(7월 6일)에 씨를 뿌려 상강(10월 23일) 후에 거둬 들였는데, 양이 풍족하지 않았다. 섬 사람들은 겨울에 메밀을 재배해 배고픔을 이겨냈다. 당시에는 2기작 품종이 없어 일년에 한 번 재배했다. 비교적 해발이 높은 곳에서 길렀다.
제주 여성들은 출산하면 메밀조베기를 먹어 피를 맑게 했다. 메밀범벅은 온 식구의 허기를 달래주던 음식이었다.
메밀은 제주의 관혼상제에 많이 쓰였다. 가난한 시절 친정 부모의 제삿날에 빙떡을 만들어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곡물이었다.
동네에 사람이 죽으면 메밀돌레떡을 만들어 부조를 대신하기도 했다. 메밀돌레떡은 메밀가루를 반죽해 빈대떡처럼 넓직하게 만드는데, 물에 삶아 건져낸 뒤 두 개를 붙여 한합으로 했다.
메밀쌀에서 전분을 빼내 만든 메밀청묵은 제주에선 빠지지 않고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이다. 청묵을 쑬 때는 솥에서 40분 넘게 저어야 하는데, 어릴 때 게으르게 젓다가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아본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 갖고 있다.
몸국은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다. 돼지를 삶아낸 국물에 모자반(제주어로 ‘몸’이라고 함)을 넣고, 메밀 가루로 농도를 맞춰 만든다.
제주의 국은 몸국 말고도 접작뼈국처럼 메밀가루를 풀어 넣는 것이 많은데, 이는 메밀가루가 국을 걸죽하게 해서이기도 하지만 별다른 양념이 없어서 메밀 가루의 구수한 맛을 내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빙떡은 대표적인 제주의 메밀음식이다. 예전에는 팥도 넣고, 무도 넣었다. 지금은 빙떡하면 채썬 무를 익혀 넣은 것을 말한다.
메밀 껍질에는 살리실아민이라는 독성이 있다. 고려 말 중국 원나라는 고려를 몽골의 속국으로 삼으면서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했다.
당시 원의 관료들은 제주 사람들의 기력을 쇠하게 하기 위해 메밀을 재배하도록 했는데, 제주 사람들은 해독작용이 뛰어난 무를 함께 먹어 지혜롭게 메밀을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때 제주 사람들이 만들어 먹은 음식이 빙떡이다.
꿩메밀칼국수라는 전통 음식도 있다. 이름이 조금 낯설지만, 제주의 재래시장이나 작은 골목 식당에서 사 먹을 수 있다.
옛날 제주 산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늦가을과 겨울철 생계 수단으로 노루, 꿩, 오소리 등을 사냥해 먹었는데, 특히 꿩은 원기를 북돋우는 음식으로 많이 쓰였다. 살은 잘게 찢어서 꿩엿으로 활용하고, 살을 뺀 나머지 부분은 푹 삶아서 그 물에 메밀칼국수를 넣고 끓여 먹었다.
제주테크노파크가 작성한 ‘제주 메밀의 인문사회학적 자료 및 관련산업 조사 연구보고서’에선 메밀 관련 제주 전통음식이 41종류로 조사됐다. 이는 강원도 17종류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수다. 밥을 보완할 수 있는 국류, 포만감을 주는 범벅과 국수류, 의례에 사용된 떡류 등 쓰임도 다양했다.
제주에는 특이하게도 메밀의 기원이 자세히 언급된 설화가 전해진다.
제주도의 서사무가 ‘세경본풀이’(자청비가 농사를 관장하는 세경신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를 보면, 자청비는 하늘나라에 세력 다툼으로 난리가 나자 서천꽃밭에 따온 멸망꽃으로 하늘의 난을 평정한다. 그리고 시아버지인 옥황상제가 내려주는 여러 하사품 중 오곡 씨앗을 골라 고향 제주로 돌아와 심고 가꿨다.
그런데 급히 오느라 씨앗 다섯 개 중 하나를 빠뜨렸다. 자청비는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 나머지 씨앗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메밀이다. 자청비는 여름 파종 때가 지나 메밀 씨앗을 뿌렸지만, 다른 곡식과 더불어 가을에 거둬들인다.
실제로도 메밀은 생육기간이 짧아 다른 곡식보다 늦게 파종해도 비슷한 시기에 수확이 가능하다. 메밀의 특성이 설화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지난 2017년 국제천문연맹은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소행성대에서 가장 큰 천체인 왜행성 ‘세레스(Ceres)’에 ‘자청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행성 지명이 우리말로 명명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세경본풀이 외에도 제주의 여러 설화, 전설, 민단에 메밀 음식이 자주 등장한다.
건강과 생태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메밀을 심어 경관 작물로 활용하고, 여기서 생산된 메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어 수익을 내는 마을과 영농법인이 늘고 있다.
메밀꽃은 모양이 아름답고 개화기간이 매우 길어 오름이나 밭담과 함께 새로운 제주의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트레킹, 음식, 메밀 제품 등을 선보이는 메밀 축제는 개화기인 5월과 10월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 자원으로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다.
수요에 부응해 메밀 샐러드나 메밀 파스타, 메밀 타르트, 메밀 식빵, 메밀 아이스크림까지 메밀을 주재료로 하는 다양한 메뉴 개발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 23일 마을과 영농법인이 협동해 메밀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서귀포시 안덕면 광평마을을 찾았다. 식당에는 건강한 메밀 음식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곧 수확을 앞둔 메밀밭은 흰꽃이 떨어지고 붉은 열매가 남은 상태였다.
광령마을 주민들은 29일 메밀을 모두 수확했다. 지금 사용 중인 봄 메밀이 모두 소진되면 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손님을 맞을 계획이다.
주민들은 해발 500m 중산간 고지에 위치한 마을의 특징을 담아 ‘한라산 아래 첫 마을’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특허성을 인정받은 메밀 재배, 메밀을 활용한 다양한 제품 개발, 직영식당 운영, 메밀축제 개최 등 제주메밀을 알리기 위한 다채로운 노력을 높게 평가 받아, 2022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한 ‘전국 농촌융복합산업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메밀꽃 필 무렵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뜻한다. 장돌뱅이 허 생원의 전성기는 오래전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보낸 그날 밤이다.
소설의 끝에서 허 생원은 우연히 만난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동이의 어머니가 있는 제천으로 향한다.
이는 곧 허생원에게 또 다른 메밀꽃 필 무렵이 찾아올 것을 의미한다. 10월 제주의 중산간 들녘에 메밀이 익어가고 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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