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신데렐라가 된 성노동자의 일장춘몽
[장혜령 기자]
▲ 영화 <아노라> 스틸 |
ⓒ 유니버설 픽쳐스 |
<아노라>는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미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젊은 거장 반열에 든 '션 베이커' 감독은 이번에도 미국의 성노동자, 이민자, 중독자, 빈민층을 주인공 삼아 낮은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의 영화에는 유독 포르노 배우, 성소수자, 스트립 댄서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은 미국의 민낯을 드러낸다.
전작들의 기시감이 살짝 엿보이는데, 션 베이커의 팬이라면 아는 만큼 보이는 즐거움이 클 테다. <아노라>의 후반부 대환장 발악쇼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와 바람피운 남자친구를 찾아 LA를 활보하는 흑인 트랜스젠더의 상황을 담은 영화 <탠저린>을 떠오르게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디즈니랜드 입장이 소원이던 아이의 바람처럼 주인공 아노라는 신혼여행지로 디즈니랜드를 꿈꾼다. 아노라가 가장 좋아하던 캐릭터가 신데렐라인 점도 흥미롭다. 잿빛투성이의 평범한 여성은 마법의 시간 동안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지만 그 효과는 자정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관계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은 <스타렛>과 닮았다. 사소한 일에서 시작한 일이 손쓸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점입가경은 퇴물이 된 포르노 배우의 현실을 녹여낸 <레드 로켓>을 따라간다. 매 작품마다 소외계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 실존 인물 같은 누군가의 인생을 통째로 옮겨 온 것 같아 현실감이 크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
ⓒ 유니버설 픽쳐스 |
아노라에게는 꽤 괜찮은 제안으로 들린다. 찌든 가난을 청산하고 장밋빛 미래를 잠시 상상한다. 사랑이 없으면 어떤가 어쨌거나 둘은 합의 하에 빠르게 부부가 되길 원하는 목적은 같기 때문이다. 당장 결혼은 해야 하니 가능한 라스베이거스의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뭐가 그리 급한지 속전속결. 패스트푸드를 주문하듯 즉석에서 '결혼'을 해치워 버린다.
한편, 동의도 없이 치러진 아들 결혼 소식을 두고만 볼 수 없던 이반의 부모는 미국의 하수인에게 결혼 무효화를 지시한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생각에 들떴던 아노라는 갑자기 들이닥친 하수인 3인방(카렌 카라굴리안, 바체 토브마시얀, 유리 보리소프)에게 저항하지만, 그러는 사이 이반은 신부를 버린 채 줄행랑을 치고야 만다. 할 수 없이 아노라는 하수 3인방과 이반을 찾아 밤거리를 활보하게 된다.
아노라는 허탈하다. 낭만에 빠져 앞뒤 따지지 않고 충동적으로 결혼까지 했지만 남편이 도망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모님을 향한 치기 어린 반항의 연장선에 휘말려 버린 아노라는 끝까지 결혼을 유지하려 발악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예정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자정이 다가오면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신데렐라의 마법처럼 낭만은 끝났고 현실은 암담하다.
▲ 영화 <아노라> 스틸 |
ⓒ 유니버설 픽쳐스 |
영화 내내 갖은 멸시와 환멸을 겪던 아노라는 꿋꿋하게 버텨내며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션 베이커의 영화답게 성노동자의 노동이 휘발되고 폄하되지 않는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
ⓒ 유니버설 픽쳐스 |
또한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한 하수인 3인방 중 토로스 역의 카렌 카라굴리안은 실망시키지 않고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어쩌면 <아노라>는 카렌 카라굴리안에게 바치는 러브레터일지도 모를 일이다.
국내에 <6번 칸>,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로 이름을 알린 유리 보리소프는 하수인 3인방 중 이고르를 맡았다. 아노라의 굴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눈빛으로 위로하는 감정연기가 심금을 울린다. 강렬한 외모와 달리 속 깊은 정과 순수함을 겸비한 캐릭터를 인간미 넘치는 역할로 승화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뭘 더 감추려고? 윤석열 정부, 정보 은폐 꼼수 쓰고 있다
- 위기 강조 한동훈, '자체 김건희 특검' 묻자 동문서답
- 40년 외교통의 우려 "북러 혈맹으로 한반도 평화 멀어져, 대통령 거친 언어 위험"
- 부활 앨범에 정부가 강제로 넣었던 곡... 지금은 이렇게 한다
- "내 핏줄이니까" 이 말에 부모·자녀 모두 불행해집니다
- "'지옥'은 연상호 최고의 작품, 유아인 하차에 시행착오 많았다"
- 허은아 "김건희 여사와 7월 통화...용산이 왜 흘렸는지 의문"
- 왜 한국에서 탈시설은 '비싼 정책'이 되었는가
- '박정희 순시 맞춰 시위를!', 발칵 뒤집혔던 청주 이야기
- "제발 살려달라"... 헌법재판소가 놓친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