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왜 점령과 전쟁을 당연시하는가
[이찬수]
▲ 지난 7일(현지 시각)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다히에를 공습해 화염이 발생하고 있다. |
ⓒ UPI/연합뉴스 |
이스라엘-가자 전쟁이 확대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가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한다며 헤즈볼라의 거점인 레바논까지 공격하기 시작했고,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중동 지역의 맹주 이란이 이스라엘과 직접 전쟁을 벌일 가능성마저 커지고 있다. 이른바 중동발 3차대전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런 불행하고 참혹한 일은 왜 벌어지게 된 것일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전쟁의 배후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정점에서 유대인의 자기 정당화의 역사와 만난다.
일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 자기 조상 적부터 살던 땅이기에 현재 자신들이 거주하는 것은 물론 후손에까지 두고두고 물려주어야 할 땅이라고 믿는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이런 사실을 당연시한다. 나아가 일부 유대인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전인 '타나크'(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1)에 기반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토지소유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을 위해 준비된 '빈 땅'이었고, 타나크는 그 빈 땅에 대한 일종의 '땅문서'처럼 간주하기도 했다.
물론 팔레스타인은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의 땅이었다. 거기가 빈 땅이었던 적은 없을뿐더러 일부 유대인의 주장과 달리 타나크는 실제로 땅문서가 될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그럴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 땅이 어디서부터 어디를 의미하는지 경계를 측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더욱이 타나크는 일반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책이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사용된 유대교 문헌은 '탈무드'였고2), 타나크는 탈무드의 해설에 비추어야 읽히고 이해될 수 있는, 독립적이지 못한 문헌이었다. 타나크 중에 토라(모세오경) 정도가 그 줄거리와 상관없이 회당에서 일부 선택적으로 낭송되는 문헌으로 쓰이곤 했다.
구성된 민족 의식
그러다가 20세기 전후해 타나크의 영향력이 커졌다. 자신들의 땅을 회복하려는 이들을 중심으로 타나크는 유대인의 단일한 기원을 강조하고 유대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이스라엘이 마치 수천 년 동안 단일한 민족 의식 내지는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해 오기라도 한 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의 기억을 재구성했다. 타나크를 통해 오늘의 유대인들이 동일한 조상들과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장대한 서사가 구성되었고,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던 '빈 땅'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서사와 이미지가 이스라엘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심 요소'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역사 의식을 공유하지 않기에 자신들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살 자격이 없는 이들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런 태도와 인식은 가공된 대중적 정서였다. 일반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명백한 국제정치적 논리보다는 현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자연스럽게 정당화하는 흐름에 익숙했다. 이런 분위기가 크다 보니, 교수나 전문 연구자들도 대중적 정서에 도전하는 연구를 잘 하지 못했다. 했다 해도 대중은 물론 대중의 정서를 이용하고 소비하며 사는 정치인에게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학계는 자신들의 역사를 일반 역사적 사실이나 중동의 역사적 흐름과 단절한 채 자기만의 자기중심적인 연구를 수행해 왔다. 그들에게 '유대인'은 '이천 년 전에 추방된 민족의 후손'이었다. 이것을 거부하면 반유대주의자로 취급받았다.
신화를 역사로 만들기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시오니즘이 발흥하기 이전 유럽에서는 "모든 유대인들이 저들만의 기원을 가진 하나의 민족에 속한다"고 주장하면 당장 반유대주의자로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유럽 및 세계 각지에 섞여 살며 얼굴 생김새도 천차만별이었던 유대인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 국가수립선언문 |
ⓒ 이스라엘 외교부 홈페이지 |
자기 땅에서 강제로 추방된 이후에도 유대 민중은 디아스포라 시절 내내 신앙을 지켰고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기도와 희망을 멈추지 않았다. 그곳으로 돌아가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출처: 이스라엘 외교부 홈페이지).
▲ 슈무엘 아그논 |
ⓒ Moderna Museet |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추방당한 역사적 재난의 결과, 저는 유배된 도시들 중 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저 자신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고향', '만들어진 유대인'의 자기 정당화의 정서는 강력했다. 그렇게 '신화'는 '역사'가 되었다.
'역사가 된 신화'가 오늘날 이스라엘이 벌이는 폭력적 전쟁을 자기중심적으로 정당화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은 오로지 유대인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알리기 위한 외부인들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1)타나크(Tanakh)는 유대교 경전이며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한다. 토라(Torah, 모세오경), 느비임(Neviim, 예언서), 케투빔(Ketuvim, 성문서)의 약자이다.
2)유대인의 반로마전쟁(66~73년) 당시 유대교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는 민족의 정치적 독립보다는 정신적 보존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지중해 인접 지역인 야브네로 피신했다. 거기서 제자단을 이끌며 유대교의 교리와 율법의 체계화를 도모했다. 일관성 없이 흩어져 있던 유대교 경전들을 '토라', '느비임', '케투빔'으로 분류하면서 본격적인 경전 편찬 작업을 했다. 제자단은 기본의 구전 율법과 주석서들을 한데 모아 '미쉬나'를 편찬했다. '반복해서 배우는 구전 전통'이라는 뜻의 미쉬나는 모두 4천여 개 항목으로 구성된 랍비들의 율법 조항 집대성문이다. 바빌로니아에 흩어져 살던 랍비들은 미쉬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했고, 미쉬나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종교, 도덕에 관한 가르침을 다시 집대성했다. 6세기 초에 이르러 완성된 이 문헌을 '탈무드'라고 한다. 유대인의 신앙과 실천의 지침이 되는 모든 사항들이 백과사전처럼 집약되어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에게는 이 탈무드가 실질적인 경전의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 경전인 타나크는 탈무드의 해설에 비추어서만 읽을 수 있는, 독립적이지 못한 문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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