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꼭지 따면 상품권”…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1만5000원’[영상]

최종권 2024. 10. 30. 11: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9일 충북 청주 육거리종합시장에 있는 일하는 밥퍼 작업장에서 소윤호 육거리시장 상인회장(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이 참여자들과 함께 온누리상품권과 쪽파를 들고 웃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충북 ‘일하는 밥퍼’…채소 손질 2시간에 온누리상품권


지난 29일 충북 청주시 석교동 육거리종합시장. 채소 전처리 작업장 안에서 70~80대 노인 20여 명이 테이블에 수북이 쌓인 깐마늘을 손질하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5명이 둘러앉아 쪽파를 다듬었다. 충북도가 취약계층 노인을 위해 마련한 ‘일하는 밥퍼’ 시범사업 현장이다. 전통시장에 있는 채소 가게가 맡긴 마늘·고구마 순·쪽파 등을 대신 손질해 주는 사업이다.

사업에 참여한 노인은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일하고 봉사 수당으로 온누리상품권 1만5000원을 받는다. 이중 충북도가 1만원, 전처리 의뢰 시장 상인이 5000원을 부담한다. 이달부터 주 5회 참여자를 모집해 시행하고 있다. 빈 점포를 빌려 작업 공간으로 꾸몄다.

소윤호 육거리시장 상인회장은 “오늘은 시장 상점 2곳에서 맡긴 마늘 200㎏과 쪽파 10단을 작업할 예정”이라며 “큰돈은 아니지만, 일을 마친 어르신이 상품권으로 식사를 해결하거나 장을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육거리시장 일하는 밥퍼 참여자들이 대형 테이블에서 마늘을 손질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TV보는 게 일상인데 불러줘서 고맙죠”


이날 마늘 꼭지 따기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대부분 70~80대였다. 김분자(72)씨는 “마늘 손질은 집에서 늘 하던 일이라 익숙하다”며 “집에서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고 여럿이 모여 일하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박노인(86)씨는 “여기 오기 전에는 경로당에서 TV를 보거나 누워있는 게 일상이었다”며 “일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고 했다. 강춘자(82)씨는 “온누리상품권을 모아서 시장에서 반찬도 사고, 김장 재료를 살 계획”이라며 웃었다. 거동이 불편해 경로당 청소 봉사를 중간에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던 참여자도 있었다.

일하는 밥퍼는 지난 9월 초 청주시 상당공원에서 첫선을 보였다. 상당공원에서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노숙자나 저소득 노인 등 25명을 선발해 마늘 손질과 케이블 타이 정리를 맡긴 뒤 한명당 8000원짜리 식권을 나눠줬다. 작업 시간은 1시간30분 정도다. 일을 마친 참여자는 봉사단체인 ‘어울림’과 연계한 식당(4곳)을 골라 밥을 먹을 수 있다.

이정우 일하는 밥퍼 실버봉사단장은 “공짜 밥을 먹고 눈치 보던 이들이 떳떳하게 한 끼를 해결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꼈다”며 “일하는 밥퍼는 노인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해 자존감을 높이는 ‘생산적 복지’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김영환 충북지사가 지난 21일 충북 청주 두꺼비시장을 찾아 일하는 밥퍼 참여자와 마늘 꼭지 따기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충북도


마늘·쪽파·고구마 순 정리 후 채소가게 전달


이 사업을 눈여겨본 김영환 충북지사는 전통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시장 상인회와 간담회를 통해 “채소를 팔기 전 전처리 작업을 돕는 인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았다. 전통시장 가운데 청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육거리시장에서 지난 11일부터 일하는 밥퍼를 도입했다.

열흘 뒤인 지난 21일에는 청주 사창시장(사창동)과 두꺼비시장(수곡동)에 잇달아 이 사업을 도입했다. 소윤호 상인회장은 “채소를 매대에 내놓기 전 다듬기 작업은 통상 가게 주인 혼자서 했다”며 “양이 많을 때가 문제다. 급하게 인부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대부분은 돈을 아끼기 위해 밤늦도록 작업하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육거리시장에서 채소 가게를 운영하는 박영미(51)씨는 “물건을 파는 중간중간 쪽파 손질을 해도 하루 10단을 하기가 버거웠다”며 “저렴한 비용에 전처리 작업을 맡길 수 있어서 장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우 단장은 “70~92세까지 참여 연령이 높은 편”이라며 “주 3회 운영하는 사창시장과 두꺼비 시장은 평균 15명이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육거리시장 일하는 밥퍼 참여자들이 마당에서 쪽파를 손질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소외 어르신-전통시장 상생하는 ‘생산적 복지’


작업장은 시장 안에서 놀고 있는 점포를 월세 40~50만원을 주고 임차하거나, 공용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충북도는 상품권 구매와 운영비 등을 합쳐 시장 3곳에 2000만원을 투입한다. 일하는 밥퍼 사업비는 고향사랑기부금을 쓴다.

류석열 충북도 시장활성화팀장은 “일하는 밥퍼가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 노인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상품권 소비로 시장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며 “품이 많이 드는 야채 손질 작업을 한꺼번에 처리하니 시장 상인도 만족할 수 있다”고 했다. 충북도는 12월까지 시범사업을 한 뒤 단계적으로 일하는 밥퍼를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청주=최종권 기자 choi.jongkwo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