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환경과 전략하에서 재현... 북한군 해외파병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대통령실 보도자료 |
ⓒ 대통령실 |
'위험하고 전례 없는', '현대전을 치러보지 않은 북한' 같은 표현은 대통령실이 북한의 베트남전쟁(월남전) 파병이 갖는 의의를 낮게 평가할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북한의 파병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미국의 세계전략에까지 영향을 끼친 사실을 고려하면, 이 같은 통화 내용은 엉뚱해 보인다.
베트남전쟁은 1960년에 남·북 베트남 간에 발발했다가 1964년에 미국의 개입으로 국제전이 됐다. 북한이 여기에 참전했다는 점은 한국군에 의해서도 공식 확인했다. 1968년 6월 10일 자 <동아일보> 기사 '북괴군의 월남 참전'은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8일 월남에 북괴군이 참전하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고 보도했다.
북한군의 참전은 남베트남 남부 지역인 냐짱(나트랑)에서 확인됐다. 북한군이 남베트남 깊숙이 들어갔던 것이다. 위 기사는 "나트랑 서북쪽에서 최근 벌이고 있는 백마부대 제6호 작전 도중 우리 백마 용사들은 월맹 정규군 제18B연대본부를 포위 섬멸한 결과, 적 317명을 사살하고 적의 기밀문서 445점을 노획하였는데, 그중 8구의 시체 가운데 우리말로 쓰인 일기책과 노한(露韓)사전 등이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북한군 파견은 지상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발견됐다. 1966년 12월 22일 자 <동아일보> 기사 '북괴 제트조종사 월맹 파견'은 "미국이 입수한 정보로는 25 내지 50명의 북괴 조종사들이 월맹에 파견돼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 미그기 조종사들의 파견은 소련의 지원에 따른 것이었다. 현 베트남의 모체인 북베트남은 미그기 조종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위 1968년 기사). 그렇다고 소련과 중국(중공)의 미그기 조종사를 불러올 수도 없었다. 1956년부터 소련과 이념분쟁 중이던 중국이 자국 조종사를 베트남에 보내 소련 전투기를 조종하게 하기는 곤란했다. 또 소련은 군사 지원은 하면서도 자국 병사들의 피를 흘리려 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미그기 조종사들이 투입됐다.
▲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에 대한 국정감사를 앞두고 29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직원들이 감사위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
ⓒ 국회사진취재단 |
금년 들어 김일성·김정일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행보가 강화되고 있지만, 그 역시 해외파병에서만큼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례를 무시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번 파병이 베트남전 파병 때와 비슷한 국제환경 및 대남전략하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이 조부의 사례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돼 있는 것이다.
미국은 1950년대 들어 유럽과 제3세계에서 영향력 약화를 겪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이 보여준 대응 방식은 한국·일본·대만·필리핀처럼 가장 확실한 우방들이 포진한 동북아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60년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으로 격상시키면서 자위대가 주일미군과 공동보조를 맞추게 했다. 그러면서 1961년에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한일관계 복원에 나서게 함으로써 한미일 안보협력체제의 구축을 추진했다. 미국의 이런 구상은 한국인들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 인해 상당 부분 약해진다.
1960년을 전후해 미국이 동북아 냉전을 강화하는 이 정세는 북한이 중국·소련과 밀착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북한은 1961년에 양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소련과 중국이 반목 중이었기 때문에 북한을 매개로 한 북·중·소 3각 체제는 강력하게 구현되지 못했다. 한일관계가 한미일 체제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중소관계가 북중소 체제에 영향을 준 결과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냉전전략에 따라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결 구도가 첨예해지는 지금, 김정은은 통일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면서 남한에 대해 공격적이고 쌀쌀맞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가 지도자가 입에 담기 어려운 거친 언사들은 김여정 담화를 통해 내보내고 있다. 또 무인기를 용산 대통령실 상공에도 날려 보내고 남한의 대북전단 부양에 맞서 오물풍선도 띄워 보내고 있다.
1960년대의 김일성도 중·소와의 동맹을 강화한 상태에서 대남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이 시기의 김일성도 통일정책을 멀리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1961년부터 추진한 남조선혁명론은 남한을 곧바로 통일하지 않고 남한 내부의 혁명을 먼저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침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난 것이 무장공비의 대대적 파견으로 상징되는 군사적 압박의 강화다.
2011년에 미국 외교협회가 발표한 '한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 보고서에 의하면, 1955년부터 2010년까지 한반도에서 발생한 군사충돌 1436건 중에서 49.4%인 709건은 1960년대 후반에 발생했다. 1960년대 전반에 20.1%, 1970년대 전반에 10.7%가 일어난 사실은 1960년대 후반의 긴장 고조를 잘 보여준다.
▲ 1966년 12월 22일 자 <동아일보> 기사 "북괴 제트조종사 월맹 파견"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북한 공군은 1966년 말부터 사회주의진영의 국제주의적 의무와 군사적으로는 실전 경험을 얻기 위한 측면에서 파병을 결정하고 1개 비행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의 노이바이와 캡이라는 두 곳의 기지에서 주둔했으며, 200여 명 이상의 조종사와 별도의 지원 인력 등을 포함하여 베트남전쟁에 연인원 1000명 이상의 병력을 파병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 공군은 미 공군에 상당한 위협이 됐다. 위 논문은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 없음을 전제로 "미 우드로윌슨센터의 연구서에는 북한군과 함께 복무했던 북베트남 퇴역 장군의 증언을 토대로 1967년과 1969년 초 사이에 북한 공군이 미군기 26대를 격추했다고 했다"고 알려준다. 이 논문에 언급된 탈북 조종사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공군에 528비행연대가 창설된 것은 1969년 5월 28일 북한 미그기 8대가 미군기 12대를 격추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일이었다.
북베트남은 미그기 조종사를 자체적으로 확보하기 힘들었고 중·러는 조종사 파견을 꺼린 사실을 감안하면, 베트남 상공을 날아다닌 미그기 조종사들은 사실상 북한 군인들이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베트남전쟁의 공중전은 북·미 대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국 군대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시기에 북한은 남한뿐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도 더욱 대담해졌다. 북한이 1968년에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1969년에 미군 정찰기 EC-121기를 격추하면서 미국과 전쟁을 벌일 듯한 태도를 보인 일들은 베트남 전황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베트남 파병과 대남·대미 전략의 상관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특히 EC-121기 사건은 베트남전쟁에서 습득한 전술이 적용된 무대였다. 위 논문은 "북한이 베트남전쟁을 통해 익히고 체계화시킨 공중매복전술을 실전에 처음 사용한 것이 EC-121기 격추사건"이라고 한 뒤 탈북 공군 장교인 이웅평의 글을 기초로 "당시 북한은 함경북도 어랑비행장에 MiG-21기를 지상에 엄폐시켜놓고 EC-121기의 접근을 기다리다 기습적으로 출격해서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설명한다.
북한의 대미 자신감은 그 뒤로도 계속 나타났다. 북한군이 미군 장교들을 도끼로 해친 1976년 판문점 도끼 사건 역시 그런 흐름의 산물이다.
이처럼, 지금과 유사한 국제환경 및 대남전략 속에서 나타난 북한의 베트남전쟁 파병은 한국 안보뿐 아니라 미국 안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북한 공군이 북베트남을 돕는 가운데 미국은 1968년부터 수렁에 빠졌고 그 결과로 1969년에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태평양정책을 온건한 방향으로 수정했다. 이것이 1970년 전후의 데탕트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과 유사한 조건에서 단행된 북한의 해외파병이 그 같은 파급력을 끼쳤음을 감안하면, 이 문제에 성급하게 뛰어드는 윤석열 정권의 태도는 경솔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의중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한국의 개입부터 확대한다면 한국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명태균 여론조사', 윤석열 20대 여성↑, 홍준표 20대 남성↓조작
- 40년 외교통의 우려 "북러 혈맹으로 한반도 평화 멀어져, 대통령 거친 언어 위험"
- 부활 앨범에 정부가 강제로 넣었던 곡... 지금은 이렇게 한다
- "내 핏줄이니까" 이 말에 부모·자녀 모두 불행해집니다
- [손병관의 뉴스프레소] '박근혜 측근' 유영하가 용산 대통령실 정호성 디스한 이유
- "'지옥'은 연상호 최고의 작품, 유아인 하차에 시행착오 많았다"
- 허은아 "김건희 여사와 7월 통화...용산이 왜 흘렸는지 의문"
- 이재명, 한동훈에 '여의도 사투리' 경고... "신속히 만나자"
- 유해도서 낙인 덕 본 '채식주의자' 독서 붐
- '저질 찌라시'가 하이브 내부에서... 케이팝 1등기업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