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도서 낙인 덕 본 '채식주의자' 독서 붐

서부원 2024. 10. 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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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학교 도서관을 북적이게 해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서부원 기자]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책들이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진열되어 있다. 시민들이 추가로 진열된 소설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를 구입하고 있다.
ⓒ 이정민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다. 학교에선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금이 독서 교육의 적기다. 점심시간은 물론, 10분짜리 쉬는 시간에도 평소 썰렁하던 도서관이 북적이는 걸 보면, 가히 책 읽기의 '붐'이라 할 만하다. 사서 교사의 표정도 덩달아 환해졌다.

5·18 민주화운동을 모티프로 한 소설 <소년이 온다>는 이미 국어 교과 수업 때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광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5·18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역사여서 쉬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미 읽어봤다는 아이들도 한 반에 네다섯 명은 된다.

외설 소설, 좌파 소설... <채식주의자>에 붙은 이름도 가지가지

난 <채식주의자>를 골랐다. 무려 17년 전인 2007년에 출간된 소설로, 한강 작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대표작이다. 두께로만 보면 30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연작 소설인 데다 소재와 전개 과정이 낯설어 아이들이 읽어내기가 여간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긴 했다.

책의 제목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몇몇 아이들은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 맨부커상을 받은 작품이라며 짐짓 알은 척을 했다. 읽어봤다는 아이는 없었지만, 다들 수상작이니만큼 조만간 읽어보겠노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도서관에 비치된 한강 작가의 모든 책은 대여 중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몇몇 아이들에게서 엉뚱한 질문이 나오고 있다. <채식주의자>가 '19금 도서' 아니냐는 거다. 작품 속에 청소년들이 읽기에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하나같이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알게 된 거라며 나름의 근거를 댔다.

근친상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거나, '외설 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밑도 끝도 없이 페미니즘에 경도된 작품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심지어 '좌파 소설'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불렀다. 지난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분류됐던 작가의 이력이 철부지 아이들의 인식 속에선 생채기처럼 남아 있었다.

엊그제 한 학부모에게 항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아이들에게 숙제라며 <채식주의자>의 일독을 권한 게 화근이 됐다. 그는 성인에게는 위대한 작품일지 몰라도 미성숙한 아이들에게는 해로운 내용이라고 잘라 말했다. 두 번째 연작 '몽고반점'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형부와 처제 사이의 불륜 행위를 소재로 했다는 걸 문제 삼은 셈이다. 성행위 묘사 장면도 너무 노골적이어서 아이들이 읽기엔 적이 민망한 작품이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소설 전체를 읽히기보다 줄거리와 작가의 의도를 수업하듯 설명하는 방식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도서관의 하고많은 책 중에 굳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을 읽힐 필요가 있느냐고 조언하는 이들도 있다. 동성 간 결혼까지 법적으로 인정하는 서구적 시각에서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겠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 수용되기는 힘들다고 했다. 음악과 영화처럼 문학에서도 '청불(청소년 불가)' 기준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폈다.

의도 파악하기는커녕 표피적 내용에만 매몰

전 세계가 찬탄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일부 학부모가 앞장서 '청불' 도서로 낙인찍는 상황이 당혹스럽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와 공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기는커녕 글감과 표피적 내용에만 매몰된 셈이다. 이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글자'를 읽는 행위일 뿐이다.

마치 대강의 줄거리만 읽은 뒤 작품 전체를 평가하는, 이른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기실 이는 아이들에겐 꽤 익숙한 풍경이다. 수능 국어 영역 시험을 준비하거나 면접에 대비할 때, 지문에 자주 출제되는 문학 작품의 요약본을 발췌해 읽는 학습법이 대세다. 그들에겐 그게 독서다.

그들에게 <채식주의자>는 '유해 도서'로 각인되어 있다. 다른 아이들에겐 몰라도 당신의 자녀에게만은 읽게 하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말한다. 채식주의자로 대표되는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적 폭력성을 꼬집는 작품이라는 설명은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문제를 제기하는 학부모와 굳이 언쟁을 벌이진 않았다. 불륜을 소재로 하고 성행위 묘사가 노골적이라는 이유로 읽지 못하게 한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고정 관념을 바루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저 고등학생 자녀를 코흘리개 유치원생쯤으로 여기는 부모의 퇴행적 인식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이들이 아직 성에 대해 무지할 거라고 여기거나, 소설을 읽으면서 왜곡된 성 인식을 갖게 되는 걸 우려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만큼은 아직 '순수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대개 이런 학부모들의 특징은 자녀가 그릇된 행동을 하면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는 핑계를 댄다는 거다.

그들이 자녀의 손에 쥐여준 스마트폰 안의 수많은 유해 콘텐츠에 견준다면, 아이들이 <채식주의자>를 읽어 왜곡된 성 인식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억측일뿐더러 기우다. 진정 걱정해야 할 건,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SNS와 온라인상에 범람하는 유해 콘텐츠에 노출되는 사회적 환경이다. 애꿎은 소설을 두고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란 이야기다.

요컨대, <채식주의자>를 '유해 도서'로 단정해 아이들의 책 읽기를 가로막는 건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는 짓이다. 노벨문학상의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한다면, 남녀노소 모두가 읽어볼 만한, 아니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작품이다. 노벨위원회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극찬한 작품을 두고 '유해 도서'로 낙인찍는 건 대한민국 사회의 옹졸함과 천박함만 드러낼 뿐이다.

이번 사달로 아이들 사이에서도 <채식주의자>는 가장 '핫한' 소설이 됐다.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거둔 셈인데, 점심시간 도서관 소파에 기대어 손에 <채식주의자>를 들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나중에 그의 독후감을 꼭 들어보고 싶다.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동료 교사들의 손에도 한강 작가의 책이 들려 있다. 적어도 올해는 국민 1인당 독서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라는 부끄러운 통계 수치가 조금이나마 개선될 듯하다. 학교 도서관을 북적이게 해준 한강 작가에게 거듭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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