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가을 새벽 빗소리가 깨운 것들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의 마을에서도 어느덧 노지 감귤이 익고 있다. 귤꽃 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감귤을 따는 때에 이르렀다. 나는 올해 귤꽃 피는 일에 조금은 특별한 마음이 일었던 것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얼마 전 졸시 ‘귤꽃’을 지었다. “내 몸은 귤꽃 만했지/ 울음도 미성(美聲)을 지녔었지/ 어머니는 내 배냇저고리를 개켜 옷장 깊숙한 데에 넣어두셨지/ 언젠가 옷장을 열어 보이며 말씀하셨지/ 얘야, 이 깨끗한 옷을 잊지마렴”이라고 썼다. 옷장에 단정하게 접고 포개서 넣어둔 배냇저고리를 보면서 하얗고 말간 몸과 다른 것의 섞임이 없는 순수를 지녔던 때를 생각했고, 그때의 깨끗함을 귤꽃에 빗댄 시였다. 지금 막 익고 있는 감귤은 그 귤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나 또한 배냇저고리를 입던 아기로부터 지금에 이른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오늘의 내 몸과 내 마음의 안팎을 찬찬히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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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을에 수선화의 촉 다시 돋고
김남조 시인 추모 행사에 큰 감명
새 시간은 수정알갱이처럼 쌓여
」
어제는 일찌감치 새벽에 일어났다. 바깥에 나갔더니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는 성기게 내려서 요란하지 않았다. 돌 위에 내려 돌이 젖고 있었다. 자박자박 가만가만 걷듯이 빗소리가 일어 가을 새벽의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두 가지 일이 떠올랐다.
하나의 일은 화단의 수선화에 관한 것이었다. 화단 한쪽에 심어둔 수선화는 올해 이른 봄에 한 차례 피었었는데, 그 후로 꽃이 지고 줄기도 시들해져 그 줄기를 자르고선 수선화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줄기를 잘랐으니 구근만 남은 상태였고 눈에 띄지 않아서 ‘이곳이 아마도 수선화의 자리이겠지!’라고만 짐작하여 생각할 뿐 그동안은 그냥 지나쳐 다니기 일쑤였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자리를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선화의 촉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쯤 올라와 있었다. 어떤 소리가 가까이에 다가와 내 귓가에서 커지고 선명해지듯이, 혹은 먼 길을 와 마침내 집에 도착한 사람처럼 수선화는 한없이 잠잠하던 그 자리 그곳에서 싹이 새로 돋아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수선화와 내가 가느다랗고 흰 실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듯이 그렇게 수선화는 다시 내게 돌아와 있었다.
또 하나의 일은 지난해에 작고한 김남조 시인의 1주기를 맞아 서울에서 열린 ‘김남조 시 전집’ 출판 기념회에 다녀온 일이었다. 이달 중순에 열린 행사의 부제는 ‘마지막 때 영혼과 사랑은 눈 감지 않게 하소서’였다. 내게도 김남조 시인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어서 옛일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행사장에서 듣고 본, 시인을 추모하는 말과 글이 더 감동적이었다. 시 전집 간행위원장을 맡은 권영민 문학평론가는 시인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시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돋보기안경을 벗어두고 왔는데 나중에 전화를 드렸더니 시인이 말하길 “권 교수, 안경 놓고 갔지? 내가 잘 갖고 있어. 그런데 어쩌면 이 안경을 쓰니 세상이 너무 밝게 보여. 그리고 가볍고. 그러니까 이거 가져가지 마. 내가 당분간 쓸 테니까”라고 해서 결국 그 안경이 시인의 유품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며 그 일을 떠올리니 슬픔이 북받친다고 말했다. 나태주 시인은 추모의 글을 낭독했다. 첫 문장은 “선생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였다. “선생님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라고 말해 시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신달자 시인은 작년 8월에 시인을 뵙고 따뜻한 물로 발을 씻겨 드렸던 일을 회고했다. 신달자 시인은 김남조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6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스승으로 모셨다고 말했다. 행사가 치러지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어느 때가 되면 꽃이 지고, 단풍이 들고, 줄기가 꺾여서 마르고, 텅 빈 듯이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다. 가을 새벽 빗소리가 내 기억 속에서 예전의 일과 옛 시간을 떠올리게 하듯이 과거의 것은 절멸하지 않고 오늘의 시간에 예고 없이 문득 되살아난다. 김남조 시인의 시 가운데는 ‘모래시계’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시의 전문은 이러하다. “청모시 얼비치는/ 새맑은 아침/ 모래시계 사륵사륵/ 수정알갱이 소리/ 세월이 쌓이는 소리// 진보라 연지빛이/ 타는 노을녘/ 모래시계 사륵사륵/ 마음이 물드는 소리/ 세월 더하는 소리// 잠 없는 깊은 밤의/ 소슬한 달빛/ 모래시계 사륵사륵/ 금실편지 오는 소리/ 세월 더욱 깊는 소리” 이 시의 표현처럼 우리의 시간은 잘록한 호리병에서 작은 구멍을 통해 모래가 떨어지듯이 지나간다. 떨어지면서 서로 쓸리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오기도 한다. 그렇게 옛 시간 위에 새로운 시간이 한 알 한 알 미세하게 쌓인다. 옛 시간 위에 사륵사륵 수정알갱이 소리를 내며 이 가을의 시간도 떨어져 내리고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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