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이름없는 ‘어공’을 위한 변명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25일부터 2017년 3월 12일까지 대통령으로서 청와대에 머물렀다. 이 1500여 일 동안 꼬박 청와대에서 근무한 이가 있다. 3.6%포인트 차로 승부가 갈렸던 대선 때는 유능한 실무자였다. 대선 후엔 청와대 행정관으로 이름 한 번 나지 않았지만 묵묵히 일했다.
청와대에 근무하던 그가 박 전 대통령을 실제로 가까이 본 건 탄핵당한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퇴거하던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를 나가는 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데, 그냥 눈물이 나더라. 큰절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회한과 안타까움, 더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자책…. 뭐가 더 컸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다. 소신에 따라 국회 보좌진으로 오래 일했고, 지지하는 이를 대통령으로 만들려 노력했으며, 청와대에선 미관(微官)이나마 헌신했다. 정치인을 추동하는 제1동력은 이름을 남기는 것이니 입신양명의 욕심도 분명 있었을 테다. 충직하고 유능하며 한 배를 탄 어공이 신명나게 일하게끔 하는 건 성공한 정부의 필요 조건이다. 대통령 여럿을 보필한 한 여권 인사는 “어공은 말하자면 각 뼈대를 잇는 관절 같은 존재다. 여론에 민감한 이들의 의견이 적절히 반영돼야 삐걱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많은 어공이 일했고, 지금도 일한다. 그런데 기자가 봐온 이 정부 어공은 유독 한숨이 잦았다. 정권 초 “검사와 경제 관료에 포획됐다”는 말이 돌 정도로 ‘늘공’(늘 공무원)의 힘이 유독 셌다. 고시 통과 스펙 없는 어공은 찬밥 되기 일쑤였다. 이른바 4대 개혁을 필두로 굵직한 정책을 발표해도 반향이 적었던 건 정무에 강한 어공이 ‘누구 편’으로 내몰려 대거 숙청되거나 기를 못 편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여겼다.
윤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앞둔 요즘, 어깨 한 번 제대로 못 펴본 어공까지 싸잡아 욕먹는 분위기다. 문고리니, 십상시니 하는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한남동 라인’이라는 조어에서 보듯 대통령 부인과의 인연까지 거론된다는 정도가 다른 점이다.
“몇몇 어공이 대통령이나 여사와의 사적 인연을 빌어 자주 월권했다. 공적 의사결정구조가 흐트러졌고, 어공 내 나름의 질서도 깨지면서 파편화됐다.” 대통령실 사정을 잘 아는 여권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름없는 어공이 한숨을 깊게 쉰 또 다른 이유를 알 법하다.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 절반, 정권의 명운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해가며 일할 이들은 누구인가.
권호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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