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의원' 못 자른 일본 자민당…민심이 정권 심판했다 [view]

오누키 도모코 2024. 10. 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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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의원 선거 하루 뒤인 28일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겸 집권 자민당 대표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일본 집권 자민당이 지난 27일 중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자민당은 단독 과반은 물론 공명당과의 연립여당 의석에서도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전체 465석 가운데 연립여당 의석은 279석(자민당 247석, 공명당 32석)에서 215석(자민당 191석, 공명당 24석)으로 급감했다. 2009년 이래 과반을 잃은 건 15년 만이다.

취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정권의 운명도 절체절명의 기로에 섰다. 201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정권을 재탈환한 이후 단 한 번도 과반을 내주지 않았던 자민당은 왜 이번 선거에서 이토록 몰락한 것일까.

김영옥 기자

한마디로 민심을 오판했기 때문이다.국민은 ‘정치와 돈’의 문제에 화를 냈지만, 자민당이 이런 분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선거전에 나섰다. 말로는 “정치 개혁”을 소리를 높였지만, 실상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의원들이 대거 공천되면서 용두사미가 됐다. 유권자들은 이렇게 나태하고 오만한 권력을 표로 심판했다.

이런 정치적 인지부조화는 이번 선거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제1차 아베 정권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2007년에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당시에도 “우리가 뭘 해도 국민은 우릴 찍어준다”는 자민당의 ‘자만심’이 발목 잡았다. 그 결과 2009년엔 민주당에 정권까지 내줬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절치부심 끝에 2012년 정권을 탈환한 자민당은 이후 세 번의 중의원 선거에서 모두 단독 과반을 훌쩍 넘겼다. 뼈저린 반성 끝에 탄생한 제2차 아베 정권이 정치 신념보다 현실주의를 우선시하며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민주당은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후텐마 비행장) 이전에 실패하는 등 아마추어적인 정치 행태를 반복하다가 철퇴를 맞았다. 이후 민주당은 분열과 재편을 반복하며 수권 정당에서 더욱 멀어졌다. 이처럼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자민당 독주는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기저엔 국민의 정치적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투표율을 보면 2014년 역대 최저인 53%를 기록한 뒤 55% 안팎을 맴돌다가 이번에도 54%로 역대 세 번째로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자민당 의석수도 2012년 이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를 간파하지 못한 아베 정권은 ‘압승’이란 숫자에 취했다. 장기집권을 거듭하는 가운데 아베파를 중심으로 정치자금조차 제대로 기재하지 않은 오만함에 빠졌다.

곪고 있던 종기가 결국 지난해 말 터졌다. 정치자금 스캔들은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를 더 구석으로 몰았다. 급기야 기시다 총리는 총재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자민당 의원들이 선택한 대안은 오랫동안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당내 야당’의 역할을 맡았던 이시바였다. 하지만 이시바는 단호하지 못했다. 만약 이시바 총리가 비자금 문제에 연루된 의원들을 모조리 공천을 주지 않고 잘라냈다면 이번 중의원 선거에서 이토록 큰 패배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난 27일 일본 도쿄의 한 기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이날 치러진 중의원 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하지만 당내 기반이 빈약한 이시바 총리는 일부 의원만 공천에서 배제하는 미온적인 대응을 했다. 이런 자민당의 태도에 물가 상승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일본 국민의 분노가 투표장에서 한꺼번에 분출됐다. 아베 시대 이후 연이어 선거 승리에 도취해 안주했던 자민당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다.

개표 결과 성난 민심은 확연했다. 비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의원 46명 가운데 62%에 달하는 28명이 낙선했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전 간사장, 다케다 료타(武田良太) 전 총무상 등 거물들도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다.

자민당의 경쟁자는 달랐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총리가 이끈 제1야당 입헌민주당은 과거와는 다른 자세로 선거에 임했다. 그간 입헌민주당의 아킬레스건은 외교ㆍ안보 정책이었지만, 노다 대표는 아베 정권에서 제정한 안보 관련 법제를 인정을 내비치는 등 자민당에 가까운 현실 노선을 추구했다.

지난 7월 도쿄도지사 선거 때까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 공조했던 공산당과 거리를 둔 것도 주효했다. 그 결과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에서 등을 돌린 보수 성향 중도층을 끌어모으면서 외연 확대에 성공했고, 의석을 98석에서 148석으로 단번에 올렸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입헌민주당 대표가 지난 27일 일본 도쿄 당 본부에서 중의원 선거 당선자 이름이 적힌 상황판을 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노다 대표가 이끄는 입헌민주당의 약진을 예감케 하는 장면도 있었다. 지난 9일 노다 대표는 당수 토론에서 “당파는 달랐지만 존경하는 선배 정치인”이라고 이시바 총리를 치켜세웠다. 이어 곧바로 이시바 총리가 지난달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한 말을 뒤집고 중의원 조기 해산에 나선 것을 두고 “뒷돈(비자금 스캔들)을 숨기고 해산한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단, 말꼬리를 잡고 단정적으로 추궁하는 기존 야당 의원들의 태도와는 달랐다. 총리와 재무상을 지낸 노련함으로 논리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고, 때론 미소까지 지었다. 반면 이시바 총리는 방어적이었다. 안정감을 앞세운 노다 대표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노다 대표는 정권 탈환까지 노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입헌민주당이 일본 국민에게 정권을 맡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입헌민주당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안다. 선거 다음날인 28일 당 관계자는 “앞으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정국이 될 것”이라며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무겁게 말했다.

신재민 기자

비록 이번 선거에선 완패했지만, 자민당의 저력을 무시할 순 없다. 자민당은 1955년 창당 이후 정권을 두 차례 내줬는데, 그때 보여준 정권에 대한 집착은 다른 야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처음 정권을 빼앗겼던 1993년에는 오랜 적수였던 사회당과 손을 잡고 정권을 탈환할 정도였다. 이번에도 의석을 4배(7→28석)나 키운 국민민주당과 부분적으로 정책 연합을 맺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유지하려 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총선으로 이시바 정권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다만 내년 7월에 치르는 참의원 선거까지 시한부 생명 연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 내에서 이시바 ‘끌어내리기’가 시작될 수 있다.

자민당의 참패는 변화하는 민심을 무시하고 구태를 답습하는 정당은 결국 국민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상식'을 입증했다. 이를 두고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어느 나라나 민심을 이기는 정치는 있을 수 없다”며 “일본 국민처럼 순응적인 유권자도 정치자금 비리에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하물며 한국 유권자는 말할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onuki.tomok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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