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광화문 광장에서 문학의 춤을

2024. 10. 29.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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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은 낯설다. 그날 저녁 세계를 강타한 소식이 그랬다. 황망했다. 몇 초간 머리를 떠돌던 반문(反問)이 사라지자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노벨문학상이라니! 언론조차 당황했다. 모든 신문이 헤드라인을 바꿨고 방송사마다 수상자의 영상 흔적을 찾아내느라 법석을 떨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대 경사에 어수선하고 들뜬 밤이었다. 웹진과 유튜브에 푹 빠진 젊은 세대는 저 멀리 밀어낸 문학에 약간의 미련을 표했을 테고, 기성세대는 문학과 함께 방황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 노벨문학상 소식에 잠 못 이룬 밤
이땅의 작가들에게 준 천상 선물
고통의 향연이 문화대국의 열쇠
세종 동상 앞에서 문학의 축제를

노벨문학상이란다! 신채호의 표현을 빌자면, ‘6·25 전쟁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 할 만하다. 아사달과 아사녀가 달밤에 손잡고 춤추는 그런 환희였다. 문학상이라서 의미는 더욱 빛났다.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은 문명을 이끄는 과학적 동력이라면, 문학상은 인류의 보편적 고뇌를 비추는 정신 미학이다. 한국문학이 21세기 세계인의 중추신경을 건드리고 감전(感電)시켰다는 것이 문학상의 진수다. 드디어 문화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궁핍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이 땅의 시인과 소설가들, 혼(魂)을 가꾸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내리는 ‘인정(認定)의 만나’가 아닐 수 없다.

독자들은 질문한다. 왜 하필 한강 작가인가? 한국은 인구수에 비해 수많은 작가들이 떴다 졌다. 다른 예술에 비해 유독 문학이 차고 넘치는 나라였다. 지금은 비록 과학에 자리를 내줬지만, 1970년대까지 시대정신을 이끌어 왔던 화두와 사상의 편린이 문학에서 나왔다. 작가는 사상가로 통했다. 식민시대와 전쟁의 상처를 문학으로 견딘 선배 작가들이 노벨상의 토양을 이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줄기에서 새로 뻗은 가지에 한강 작가가 있고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의 본능적 고통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모든 인간에 공통된 운명과도 같은 보편적 질곡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이 당장 만나는 것이 ‘고통’이다. 이게 노벨상인가? 그렇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고통을 품고 산다. 그 기원을 알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의 감옥이다. 데뷔작부터 그랬다. “어둠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새 그의 머리맡을 서성이고 있었을 뿐이다” (『붉은 닻』, 1994). 그 어둠의 근원은 가족이거나 생득적이다. 아름다운 연정(戀情)을 기대하게 하는 『여수의 사랑』(1995)엔 어릴 적 트라우마가 결벽증과 신경증으로 번진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가슴이 아리다. 계속 읽기에 버겁다. 책장을 덮어야 하나? 25세의 여성 작가는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우리들 삶의 원형에 똬리를 틀고 있는’(김병익, 해설) 아픔을 칼날처럼 선연하게 추적한다. 그것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스웨덴 한림원이 말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이라고. 사적 트라우마에서 사회성으로 나아간 작품이 『채식주의자』(2007)다. 여성의 개성과 주체성이 가족 폭력과 사회적 통념에 의해 차단돼 미적 광기로 표출되는 어둡고 처연한 언어 공간에 세계인은 전율했다. 고통은 인류사를 관통하는 전류다. 그 전류를 생성하는 작가는 어지간히 힘들지만, 『그대의 찬손』(2002)에서 이미 각오한 바다. “내가 죽고, 내가 쓰는 소설과, 그 소설을 쓰는 나만 남는다.”

‘나를 죽인 그녀’는 이제 역사적 트라우마로 진입한다.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가 그것. 『채식주의자』 이후 10년이 걸렸다. 자전적 치유 소설인 『흰』(2016)을 통해 잠시 트라우마와 결별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소년이 결국 왔다. 작가는 5·18에 죽은 열다섯 살 중학생 동호의 영혼에 빙의해 살육현장을 떠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국가폭력의 기억을 체화한 두 주인공이 펼치는 고통의 축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간단없이 무너뜨린다. 5·18과 4·3은 상징일뿐, 작가의 시선은 인간의 연약함과 숭고함이 겹치고 나뒹구는 그 풍경에 있다. 풍경 속에 엉킨 비열한 생존 욕망과 찬란한 영혼을 캐내 불꽃처럼 발화하는 언어에 세계인들이 숨죽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거다. 번역자는 ‘무한한 섬세함으로 고통과 감정의 바닥을 파고드는’ 문장을 번역하기가 난망했을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작별하고 싶은, 작별하지 못하는, 작별해야 하는 여러 뜻이 중첩돼 있는데 불어판 『impossibles adieux』은 그것을 못 따른다. 표음어의 위대함이다. 한글은 감성 언어다. 백여 가지도 넘는 인간의 감성을 명료히 포획하는 언어가 한글이다.

한국문학이 세계정신사에 입적했다. 그것도 한글을 가지고 말이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정인지가 해례본에 썼다. 한글은 “바람 소리, 학 울음, 개 짓는 소리도 다 표기할 만하다”고. 역사적 고통의 심연을 빛 조각처럼 분해하고 표현하는 한글의 힘을 스웨덴 한림원이 눈치챘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문학의 춤을, 고통의 축제를 한판 벌일 일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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