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혜의 시선] 북 ‘폭풍군단’과 열일곱 살 소년

유지혜 2024. 10. 29.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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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외교안보부장

개인을 집단으로 명명하는 건 편리하지만, 위험하다. 그 순간 개인의 인간성은 묻히거나 말살될 수 있어서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이 그렇다. ‘특수작전군’ ‘폭풍군단’이라는 명칭은 경계심부터 높인다. 북한군의 실제 역할과 러시아가 제공할 반대급부 등을 고려할 때 한반도 안보 환경에 전례 없는 심각한 위협이 조성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건 그 뒤에 있는 개인이다.

「 러 파병 10~20대 초짜 군인들
김정은, 세습 위해 사지 내몰아
이 자체로 거대한 인권 유린

“특수작전군 11여단에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일곱 살 민준이가 러시아에 도착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처음 청진에서 러시아군 상륙함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때 민준이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제대로 된 설명은 듣지 못했다.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를 위해 존재하는 ‘인민의 군대’로서 질문은 당연히 할 수 없다. 러시아 군복을 지급 받고 몇 주간 훈련을 받을 때도 민준이는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알지 못했다. 서남부 쿠르스크로 이동한 순간까지도 말이다.

훈련은 받았지만, 총탄이 빗발치고 미사일이 날아드는 실제 전장은 처음이었다. 수시로 떠올라 순식간에 머리 위까지 치고 들어오는 드론은 여기 와서 처음 봤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고, 사지가 잘려나가는 군인들이 매일같이 생겨났다. 고향에서 인원은 계속 도착하는데, 죽고 다쳐 나가는 이들이 워낙 많으니 숫자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몇 달 전 전방 부대에서 DMZ 지뢰 매설 작업 중 폭발 사고로 실명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민준이는 참 안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차피 다칠 바에는 고향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편지 한 장 보내지 못하고 떠나온 내 어머니,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날 집으로 보내주기는 할까. 답을 듣는 게 더 무서운 질문을 민준이는 오늘도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다.”

한·미 정보당국의 평가와 외신 보도, 탈북자 증언, 전문가의 분석 등을 토대로 내러티브식으로, 가상적으로 구성해본 러시아 파병 군인의 한 달 뒤쯤 상황이다. 작위적인 측면도 있지만, 현재로선 현실화 가능성이 작지 않은 시나리오다.

가상의 북한군 이름을 민준이로 정한 건 이유가 있다. 정보당국은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대부분이 입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초짜’라고 보고 있다. 북한의 징집 연령이 17세부터이니, 미성년자인 2005~2007년생이 상당수 포함됐을 수 있다.

2005~2007년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남자 아기에게 가장 많이 지어준 이름이 민준이다. 가상의 북한군이 몇 백㎞만 남쪽에서, 민준이로 태어났다면 지금 전쟁이 아니라 대입을 준비할 터다. 게임 좀 그만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하면 했지, 오늘 아침 눈뜨는 순간 살아생전 다시는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에 가슴이 쿵 내려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파병 자체를 거대한 인권 유린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본질은 독재자 김정은이 정권의 안위를 위해 어린 소년과 청년들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전장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대가가 돈이든, 군사 관련 기술이든 김정은의 목적은 하나다. 이를 수단으로 정권을 공고히 해 ‘백두혈통 4대 세습’까지 이뤄내는 것이다. 국정원은 올해 중 총 1만명 정도 파병을 예상하는데, 설사 1만명이 전부 죽거나 다치더라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수만 명도 더 보낼 수 있는 게 김정은이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기록물인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2014년 발간)는 북한 내 인권 유린을 반인도범죄로 규정하며 “북한 정권이 주민 보호책임 이행에 명백히 실패했다”고 결론 내렸다. 10년이 지나 이제 김정은은 적극적으로 주민을 사지로 내모는 지경까지 왔다.

김정은이 저지른 이런 반인도범죄의 피해자이기도 한 파병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파병부대의 구체 행위에 따라 국제형법상 책임이 부과될 수 있다”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대북 경고(23일 ‘2024 중앙포럼’ 기조연설)는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파병군이 민간인 살상 등에 가담한다면 그 책임을 최종 결정권자인 김정은에게 물을 여지가 생긴다.

법적 입증은 지난하겠지만, 검토하는 것만도 압박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국제형사재판소(ICC) 관할 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사실이다. 김정은이 그걸 꼭 기억하길 바란다.

유지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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