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27년째 미완성, 틀을 깨는 창의성

이후남 2024. 10. 2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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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영화에서 프레임은 한글의 자모와 비슷하다. 아날로그 영화 필름을 보면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영상들의 연속이다. 그 한 장 한 장이 곧 프레임. 글로 치면 프레임이 모여 문장도 되고 문단도 되고 한 편의 작품도 된다. 그림을 거는 액자 틀도 프레임이다. 프레임을 깬다는 것은 틀을 깬다는 말이자, 기존 형식과 관습에서 벗어나는 파격을 뜻하곤 한다.

프레임을 깨는, 뿐만 아니라 프레임을 갖고 노는 아주 흥미로운 작품을 접했다. 이름하여 필립 드쿠플레 ‘샤잠!’. 지난 주말 사흘 간 서울 마곡동 엘지아트센터에서 펼쳐졌다. ‘샤잠!’이란 제목의 할리우드 수퍼 히어로 영화와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전혀 다른 무용 공연이다.

내한 공연을 펼친 필립 드쿠플레 ‘샤잠!’. [사진 엘지아트센터]

무용은커녕 무대 예술 일반에 문외한이면서 이 공연을 볼 생각을 한 것은 몇 가지 요소가 겹친 결과였다. 일단 연초 엘지아트센터의 올해 공연 목록을 우연히 보다가 뭔가 특이한데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프랑스 칸영화제 50주년 개막 공연이었단 점도 눈에 들어왔다. 칸영화제는 알다시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그곳. 이 영화제에 개막 공연이 있었다는 것도, 더구나 50주년인 1998년 시작한 공연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이채로웠다.

직접 본 공연은 상상 이상이었다. 공연 초반 무대에 투사된 영상에는 몇 가지 틀을 앞뒤로 두고 무용수들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이어진다. 이후 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그 프레임과 동작을 새롭게 펼치고 겹치는 모습이 앞서의 영상과 견줘 단연 흥미로운 입체감을 더한다. 이건 맛보기일 뿐. 이 공연이 아우르는 영상은 영화적 영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울에 투영된 모습과 거울임에도 투과된 모습을, 나아가 액자 틀로서의 프레임까지 활용하며 동작과 춤을 펼친다. 프레임에 얽매이는 듯하다가 그 틀을 뒤집어 활용하는 역발상의 순간도 재미있다. 이런 공연을 말로, 이 방면의 전문가도 애호가도 아닌 사람이 글로 옮기는 건 무리다.

필립 드쿠플레는 프랑스 연출가이자 안무가. 그의 작품 연보에는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과 여러 편의 태양의 서커스도 있다. 이날 서툰 발음의 한국어를 섞어 무대 위에서 흘러나온 말 중에 이 공연이 “미완성”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예술적 이유”뿐 아니라 “기술적 이유”라고 한 배경은 아날로그 기술을 절묘하게 활용한 공연 장면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번 공연은 1998년 초연 그대로가 아니라 2021년 만든 리뉴얼 버전. 초연 때의 밴드 멤버와 무용수들이 다수 함께한 공연이자, 무대와 영상이 그 사이의 시간을 품고 있는 공연이기도 하다. 내한 공연은 끝났지만, 틀을 깨는 발상을 꿈꾸는 이들과 나누고픈 경험이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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