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세에 죽을 운이었는데 67세까지 살았다

정만진 2024. 10. 2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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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49] 10월 28일 타계한 이강하, 김건특 지사

[정만진 기자]

 이강하 지사를 구명한 당시 이남규 안동 관찰사의 예산 기념관, 김건특 지사 공주지방법원 판결문
ⓒ 예산군청, 국가보훈부
1940년 10월 28일 이강하(李康夏)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873년 6월 28일 경북 상주 화서면 금산리 340번지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67세였다. 그는 1896년 금산(경북 김천)의진을 일으킨 이기찬 의병장의 아들이다.

이 지사는 본래 23세이던 1896년에 '죽은 목숨'이었다. 그해 3월 29일 김천 여영소·여중룡, 선산 허위·허겸, 상주 조동석 등이 김천에서 향회(鄕會)를 열어 거의(의병을 일으킴)를 결의하고 이기찬을 창의장(倡義將, 의병장)에 추대했는데, 그때 의진(의병 부대)에 참여했다가 관군에 사로잡혀 사형수가 됐었다.

관군 참령(현재의 소령) 이겸재가 이강하를 끌어내어 처형하려 했다. 그때 안동 관찰사 이남규가 보낸 서한이 상주 감옥에 당도했다. 이강하를 석방하라는 지시였다. 덕분에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고, 23세 아닌 67세까지 살 수 있었다.

이남규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강하 지사를 살렸을까

안동 관찰사 이남규는 어떤 인물이기에 이강하를 처형 위기를 빼내어 생명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을까? 이남규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20세(1875년, 고종 12)에 등과했고, 1894년 일본 공사 오도리[大鳥圭介]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했을 때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했다.

이남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통분을 못 이겨 벼슬을 버렸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는 이강하 등 의병을 방면해 구국 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결국 1906년 민종식 의병장을 숨겨주었다가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와 함께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경북 상주 출신 두 청년, 충남 예산에서 독립운동

이강하 지사 타계 45년 뒤인 1985년 10월 28일 김건특(金健特) 지사가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건특 지사도 이강화 지사와 마찬가지로 경북 상주 사람이다(함창 오사리 196). 그런데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것은 충남 예산에서였다.

1930년 1월 당시 20세이던 김건특 지사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예산에 체류 중이었다. "어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김대근이 "예산에 있는 충청남도 공립 농업학교 제4학년으로 재학 중"이었는데, 그와 함께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 전만조의 집에서 기숙"하고 있었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돌발한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 간의 충돌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 각자의 학생들이 동요가 있자 피고 두 명(김대근, 김건특)은 조선인 학생을 동정하였다. 그때 마침 (충청남도 공립) 농업학교 생도들도 역시 동요하여 동맹 휴교, 불온 격문 살포, 만세고창(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침)의 시위운동을 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교 학생 5명은 퇴학처분을 받았다.(공주지방법원 판결문)"

김대근과 김건특 두 사람은 "(충남 공립 농업학교의) 다른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어 동요시켜 학교 당국이 퇴학 학생의 복교를 허락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반 조선인 민중에게 민족적 반감을 치열하게 하는 불온문서를 살포하여 상당한 소요를 야기"하기 위해 1월 24일 오후 11시쯤부터 25일 오전 1시쯤까지 숙소에서 실행에 들어갔다.

"섬 벌레를 몰아내자" 등 불온(?)문서 제작, 배포

두 사람은 "수학 연습용 노트 및 서간문 서책을 적당한 크기로 재단하고, 적색 염분을 물에 용해하고 모필(毛筆)을 사용해 '대한독립만세', '조선민족만세', '섬 벌레를 몰아내자', '왜놈을 몰아내자', '일본 망함', '독립만만세' 등의 정치에 관한 붕온문서 약 200매를 작성"하였다.

두 사람은 "그날 밤 오전 1시경부터 약 1시간에 걸쳐서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 읍내 담배 판매소 앞, 예배당 앞, 농업학교 앞, 경찰서 앞, 보통학교 앞, 면사무소 앞 등 주요 도로 및 시장에 차례로 살포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3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6월과 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두 사람 모두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보면 두 사람에게는 모두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김대근 지사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약 2년 뒤인 1933년 3월 24일 불과 22세에 타계했다. 그 결과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라는 추가 설명까지 붙어 있다.

공훈록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식적으로 김대근 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직 22세에 지나지 않았으니 자연사일 개연성은 0%일 터이다. "섬 벌레"와 그 앞잡이 민족반역자들에게 악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새파란 젊은 나이로 하세한 지사의 명복을 빌어본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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