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장애인] 나는 물과 함께 간다

유경진 2024. 10. 2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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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복지재단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입상 작품(4)


*이 글은 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공동 주최한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에서 입상한 작품입니다. 국민일보 ‘더 미션’은 입상 작품 전체를 매주 월요일마다 소개합니다.

나는 물과 함께 간다
이제욱일상부문 최우수상(국민일보 사장상)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순간이 언제임을 알게 된다. 입대 전, 5살 때 엄마를 여읜 나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할머니께서 병환에 입원하셨고 아버지도 폐암 말기로 판정받으셨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집안 상황이 이런데도 난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야 했고 무슨 연유인지 군 생활 동안 청력이 악화하여 의병제대를 했다. 동기들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복학했지만 곧 절망에 빠졌다. 출석 부르는 내 이름이 잘 들리지 않았고 수업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수업 내용은 차치하고 출석을 부를 때마다 잘 들을 수 없어 내 이름을 부를 때 대답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내 이름과 비슷한 이름에 동시에 답하거나 아무리 집중해도 잘 들리지 않아 긴가민가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결석 처리된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경우 옆자리에 앉은 후배들은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잘 못 들었으면 쉬는 시간에 교수님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출석을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내가 하는 말을 주변에서 들을까 봐 겁이 났다. 나 스스로 장애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청각장애에 대해 말할 용기도 없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2학년 2학기쯤 출석 점수가 낮아 성적도 떨어지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큰 용기를 내어 한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청각장애로 출석을 부를 때 답변하기 힘들어 호명 대신 교수님께서 저의 출석을 확인 후 대신 출석부에 기재해 줄 수 없는지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큰 상처는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중간 중간 하시는 말씀을 잘 못 들어 되물으니 점점 교수님 언성이 커지셨다. 그리고 내가 확실히 알아들은 말은 ‘네가 그렇게 못 들어서 어떻게 물리치료사를 하겠어?’라고 하시며 화를 내셨다. 청각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용기 내 부탁했는데 거절 받으니 그 상처가 심장을 베어내듯 가슴이 아팠다. 어렸을 때 태권도 선수 생활을 하고 운동을 좋아해 사람 몸을 치료하는 물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물리치료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귀가 안 들리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못 들으니 과연 나에게 오는 환자를 내가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던 차에 교수님의 현실적인 말씀을 들으니, 절망감에 눈물이 나고 앞이 캄캄했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물리치료사가 되겠다고. 지금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내게 오는 고객들을 정성으로 치료하고 성공한 물리치료사가 되어 스스로 증명하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때가 시작이었다. 내가 물과 함께 간 시기가. 대학교 3학년 2학기쯤 사람 만나길 기피하고 전화 통화도 어려워 혼자만의 동굴 속에 갇혀 지낼 때, 우연히 학과 홈페이지를 보다 뇌성마비 친구에게 수영을 가르쳐줄 물리치료학과 학생을 구한다는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내가 한번 지도해보고 싶다고 문자를 드렸다.

중학생 때부터 수영을 해와 수영은 자신 있었지만 잘 듣지 못해서 지도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용기를 내었고 글을 올리신 선생님으로부터 엄마와 아이를 소개받았다. 아이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졌고 혼자 걸을 수 없었다. 엄마가 뒤에서 품에 안듯이 몸을 잡아줘야 간신히 발을 떼고 걷던 초등학생 아이였다. 그 친구를 물속에서 수영 지도하기 위해 나는 탈의실에서 양 귀에 있는 보청기를 뺐다. 일상에서 보청기로 큰 도움을 못 받지만 그래도 환경음은 들을 수 있었기에 보청기를 늘 착용했다. 하지만 수영 지도를 위해 물에서는 보청기를 낄 수 없었고 보청기를 빼면 시끄러운 수영장도 조용하고 고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 귀에 있는 보청기도 빼줬다. 그 친구는 뇌성마비도 있고 중복 장애로 청각장애도 있었다. 우리 둘 다 청각장애가 있지만 대화가 잘 되었다. 둘 다 잘 못 듣지만, 상대가 입 모양을 읽을 수 있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고 청각장애인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에 민감한 그 친구를 서서히 물에 적응시키며 호흡조절도 익혔다. 차가운 물에서 몸의 긴장도가 올라가 움직임에 어려움이 있지만 2주에 한 번씩 수업하고 여러 달을 함께 훈련하면서 물속에서 혼자 걷고 배영과 같이 몸에 맞는 수영 기술도 학습하게 되었다. 그렇게 움직임과 균형 조절이 좋아지고 신체 기능이 향상되면서 그 친구는 엄마의 도움 없이 땅 위에서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속에서 운동이 그 친구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운동을 좋아해 국가대표 스포츠 트레이너를 꿈꾸고 물리치료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 때 대학병원에서 실습을 하며 청각장애를 가지고 스포츠 트레이너나 병원의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청각장애를 가지고 물리치료사로 일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물속에서 물리치료를 할 수 있는 수중치료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장애아동 수영 지도 경험을 바탕으로 수중물리치료 관련 교육도 들으며 취업 준비를 했다. 아주 운이 좋게 내가 졸업할 시점에 대구의 한 장애인 복지관에서 수중재활운동실을 개장했고 나는 그곳에서 대구에서 처음으로 수중치료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는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 가지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잘 다져있고 사람들이 선호한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하다. 청각장애가 없었다면 나도 남들처럼 그런 안전한 길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울퉁불퉁하고 길도 잘 다져 있지 않다. 사람들도 많이 선호하지 않는다. 수중치료가 딱 그런 길이었다.

청각장애가 있는 나는 불완전하지만 도전하고 모험하며 새로운 길을 다져가는 것이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남들과 경쟁하기보다 차별화되고 Number One보다 Only One이 되는 그 길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뇌성마비 아이를 지도해 본 경험과 현실 직시를 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과정을 통해 이 길이 내 삶의 운명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많은 아이를 물속에서 치료하며 장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청각장애로 인해 듣기 어렵고 불편한 점으로 힘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치료하고 있는 아이들은 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물속에서 해맑게 웃고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나의 모습이 나약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장애로 인한 내면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힘이 되고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더 이상 청각장애로 인해 아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변화될 수 없는 건 수용하고 적응하기로 했다. 사람들에게도 청각장애 있는 나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필요한 부분은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분야에 전문성을 강화하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건 더욱 노력해서 변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곧바로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석사과정을 마쳤다.

곧이어 여러 대학교에 강의 요청이 왔고 직장생활과 병행해야 해서 한 학기에 한 과목을 강의하며 특강 식으로 전국에 있는 여러 대학교에 수중치료 특강을 가게 되었다. 그 이후 9년가량 근무했던 장애인 복지관에서 퇴사하고 수중운동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3명의 직원과 함께 11년간 수중운동연구소를 운영해 오며 두 대학교에서 겸임교수와 외래교수로 강의를 나가고 있다.

그 사이 장애아동을 위한 수중재활운동 도구에 관심이 생겨 재활산업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특허도 출원하고 시제품 지원사업을 통해 내가 개발한 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앞으로는 큰 비용이 들고 현실적인 제약이 있지만 장애아동들이 자유롭고 건강하게 재활 운동하고 수영할 수 있는 통합 어린이수영장을 설립하려 한다. 그 길이 험난하고 힘들지만, 장애아동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사회에 참여하여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물과 함께 간다.

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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