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시각각] 장관 빠진 고용노동부 국감

서경호 2024. 10. 28. 00:5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경호 논설위원

“해변에 물(tide)이 빠져야 비로소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워런 버핏의 유명한 말이다. 거품이 빠지면 값싼 유동성에 의존했던 부실기업의 민낯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국정감사도 물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의전과 이미지 관리(PI)라는 비단 치마폭에 싸여 아름답게 포장됐던 국회의원과 정부 부처 장차관의 실력과 인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한다. “군복 입었다고 할 얘기 못 하고 가만히 있는 건 더 병×”이라던 김용현 국방부 장관의 발언과 국악인의 연주를 ‘기생집’에 비유했던 양문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막말이 그런 예다. 기분 나쁜 뒷맛만 남겼다.

「 ‘식민지 국적’ 논란에 장관 쫓겨나
실속 없는 역사 논쟁은 피했으면
국민 피곤한 ‘소신파’ 너무 많다

‘누가 수영복 없이 수영하느냐’의 관점에서 이번 국감도 유심히 지켜봤다.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이 거의 마무리돼 가는 이번 국감에 ‘D 마이너스(D-) 학점’을 매겼던데, 그 정도 불량 국감은 아니었다. 너무 박한 점수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막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책 질의가 사라지진 않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이나 불공정거래 같은 기업 제재 사건을 다루면서 위원회 결론도 나기 전에 보도자료부터 배포한 사례가 최근 5년간 500건이 넘는다는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의 지적이나, 공정위가 지난 8년간 행정소송 패소 등으로 기업에 돌려준 과징금이 6000억원에 육박하고 과징금을 돌려줄 때 국고에서 지급한 이자만 450억원이나 된다는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의 국감 자료는 ‘경제검찰’ 공정위의 과욕을 경계하는 합리적 주장이어서 주목할 만했다.

이번 국감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국감장에서 쫓겨나고 기관장인 장관 없이 고용부 국감이 진행되는 초유의 사태였다. 그는 지난 1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고용부 국감에서 ‘일제시대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다 퇴장 조치를 당했다. 국회는 김 장관에 대한 국감 증인 신청을 아예 철회했다. 그래서 25일의 종합 국감에서도 김 장관은 볼 수 없었다. 장관이 퇴장당한 ‘장관 없는 국감’은 본 기억이 없다.

김 장관과 국회의 불화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시절인 2022년 국감에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한다면, 확실하게 김일성주의자”라며 과거 주장을 고수하다 퇴장당했다. 올해 8월 고용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식민지 시대 선조들의 국적 논란이 시작됐고 청문회는 파행됐다. 장관이 된 이후인 지난달 환노위에서도 같은 이유로 쫓겨났다.

김 장관은 국감 첫날인 10일 이른바 ‘국적’ 문제를 열심히 공부하고 나왔다고 했다. 노동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국감을 앞두고 장관이 왜 그걸 공부해야 하는가. 지켜보며 혀를 찼다. 김 장관은 필요하면 국회에서 학술토론이라도 하자고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일제강점기 선조들의 국적은 한국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야당의 유도성 질문을 슬기롭게 넘겼다.

김 장관은 취임 이후 노동 약자 보호법, 임금 체불 청산,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의 단계적 확대 적용 등을 추진하고 있다. 주 52시간제의 합리적 개편 등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도 큰 과제다. 국회를 설득하고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과제들이다. 국감장에서 쫓겨나는 장관이 이런 과업을 실행할 수 있을까.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국적이냐는 김 장관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식민지배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대법원 판례와 어긋난다는 주장 역시 현실적인 고민의 산물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감장을 실속 없는 역사 논쟁의 장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장관 없는 국감’이 벌어졌는데도 모르는 이가 많고 딱히 화제조차 되지 않는 분위기가 더 걱정된다. 김 장관은 소신이라고 믿겠지만 국민은 고집으로 읽는다. 수영복도 안 입고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소신파’가 윤석열 정부에는 참 많다.

서경호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